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역사 등 좋은글

상주의 인물(가악재 이축선생님)

문장대 2024. 1. 18. 22:50

상주 이안면 흑암리 이축선생님 묘역

붉은선은 흑암리 이축선생 묘역아래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주변 건물과 묘역을 참배하고 소나무가 우거진 뒤산으로 올랐다. 거의절벽 수준으로 고생길.노랑선은 정식 등산로를 따라 하산함. 동네 안길로 들어가 큰창고 앞으로 등산길-  처음에는 주민에게 문의요망-여러 경로가 다소했갈림- 표지기가 전혀 없음. 동네로 건물따라가면 아주쉬운 묘역인데 빙빙돌아 고생함. 앞서 올린 사서 전식선생님보다 2년후에 태어나고 조금 더 생존하신부이면 동시대 사신 분입니다.

마을전경

묘역은 대가산 기슭에 있으나 이축 신도비는 마을 입구에 있는데 촬영못했습니다.

 

이축 선생님 묘약은 흑암리 산23번지에 있다. 이축(李軸)은 조선 명종 20년(1565) 함창현 대가리에서 태어나 인조 25년(1647)에 죽었다. 호는 가악재(佳岳齋)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황령사(黃嶺寺)에서 창의하여 정경세(鄭經世)를 상주 소모관(召募官), 이축을 돌격 선봉대장으로 하여 함창 당교에 있던 왜진(倭陣)과 싸우고 고담(姑潭). 개령(開寧) 등에서 싸웠다.
묘역은 약 40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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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창의군의 선봉장 - 가악재 이축
Ⅰ. 공의 생애와 업적
가. 가계와 생애
가악재(佳岳齋) 이축[李軸, 1565(명종 20)∼1647(인조 25)]은 임진왜란 때 함창지역에서 일어난 창의군의 선봉장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덕재(德載), 가악재는 호이다. 임진왜란때 함창지역에서 봉기한 의병 즉, 창의군(昌義軍)의 선봉장으로 많은 공을 세워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시조인 통일신라시대 재상을 지낸 순유(純由)로 부터 24세손이고, 중시조 장경(長庚)의 13세손이다. 공의 11대조는 고려말 문신인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다. 아버지 장예원 판결사(종2품) 응춘(應春)과 어머니 함창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지모와 용력이 남달랐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효심이 지극하였다. 9세에 소학을 필독하고, 12세에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20세에 지극한 효성이 자자하자 현감이 도백에게 보고하여 포상코자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기도 하였다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은척면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이때 의병대장은 이봉)을 맡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 공으로 1605년(선조 38)인 41세 때에 선무원종공신록권 1등에 책록되었다.

나. 출사와 관력
임란때 창의 거병한 공적이 많았으나 이때는 양친의 상복(喪服)으로 은명(恩命)을 유보하여 출사하지 못하다가 32세인 1596년(선조 29) 정월에 부여현감으로 제수되었다(의병대장 이봉은 바로 괴산군수에 제수되었다). 재임 중에 고을의 백호(白虎)가 나타나 직접 잡으니 백성들이 탄복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또 옥천군수(종4품)로 부임하였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597년(선조 30)에 훈련원(訓練院) 정(正, 정3품, 당하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인 이안면 흑암리 대가산 아래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뒤에 경충사에 제향되었다.

Ⅱ. 임진왜란과 의병활동
가. 임진왜란과 상주
풍신수길이 육군 15만 명과 수군 9천 명으로 1592년 4월 13일 정명가도를 구실삼아 우리나라를 침략한 임진왜란은 전국토를 유린하면서 그 참화는 역대 전란사 중 피해가 가장 큰 전쟁이었다. 왜적의 침공 사실이 4월 17일에야 조정에 보고되자 비로소 군마를 조발하는 등 특단의 대책을 세웠으나 설상가상이었다. 형조참의로 있던 김성일을 경상도 병마사로 특배하고, 그가 상주를 지나면서 급보를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명하여 항전토록 하였다. 순변사 이일은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하여 군대를 편성하니 급조한 군대라 전투를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당시의 전술인 제승방략(制勝方略, 고을마다 통첩을 보내어 서울에서 오는 장수를 기다려 지휘를 받는 전투법)에 따라 상주진의 군대는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의 명에 따라 4대(隊)로 편성하여 대구로 진군시켰다.
그러나, 이미 4월 24일에는 적이 선산에 있었고, 4월 25일에는 소서행장이 이끄는 주력군 15,000여 명이 상주성을 공격하니 우리 군대는 미쳐 배치도 끝나기 전이나 모두 결사 항전하였지만, 결국은 상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순변사 이일과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도망을 갔으나 상주판관 권길(權吉), 중앙군의 종사관(從事官)과 상주 백성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지만 모두 장열히 순국하였다. 이 전투는 조선의 중앙군이 왜군과 대결한 공식적인 최초의 전쟁이다.
그러나, 이 나라 이 겨레를 보전하게 하고 결국 왜란의 종지부를 찍게 한 주인공이 있었으니 바로 무록(無祿)의 선비요, 백의(百衣)의 민초(民草)들 이었다. 왜적의 약탈과 방화는 상주의 선조들을 결속시켜, 결국 함창지역에는 창의군(昌義軍)이, 상주와 외남지역에서는 상의군(尙義軍)이, 보은과 속리산에서는 충보군(忠保軍)이 조직되어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나. 함창지역 의병의 선봉장 - 가악재 이축
상주성이 함락되고 북진을 한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함창에서 가장 먼저 의병활동이 시작되었다. 1592년 7월 26일 채유희(蔡有喜), 유종(有終) 형제는 먼저 격론을 발했다. 상주의 제현인 정경세, 조정, 권경호와 사인 이홍도 등과 더불어 은척 황령사에서 거병하기로 한 후, 채유희는 이홍도와 함께 청주에 사는 외숙인 이봉(李逢)을 의병대장으로 모셔 왔다. 20여 명의 산척(山尺)을 데리고 이봉은 7월 30일 황령사에서 100여 명이 모여 의기(義旗)를 꽂고 창의군(昌義軍)을 결성하였다. 8월 1일에는 의병소를 설치하고 가악재를 선봉장(先鋒將)으로 삼았으니(조정 임란일기) 이때 공은 28세로 혈기 왕성할 때였다. 전패(殿牌) 앞에서 회곡거의(會哭擧義)를 하고 4가지 군약(軍約)을 제정 공포하였다. 8월 2일에는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에게 오해를 염려하여 통문하였다. 이국필은 창의군의 조직부터 11월까지 의병활동을 방해하였으나 창의군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가악재실기』에 의하면, 4월 하순에 양친을 황령사로 피신시키고, 기회를 엿보고 습격하여 왜병 수명을 참살시켰다. 또한 왜적이 돌연히 이안땅으로 몰려오자 미쳐 피난을 하지 못한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홀로 돌진하여 창(槍)을 좌우로 휘두르면서 크게 호령하니 그의 용력에 눌려 적세가 크게 꺾이자 이 틈을 이용하여 주민들을 대피시켰으며, 6월에는 당교에 주둔하는 왜적에게 꿀과 떡으로 유인하여 농병(농餠, 이는 신라 김유신장군의 전법임)을 만들어 독살시켜 조령과 상주의 길목을 끊음으로써 적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였다.
그 후 창의진이 결성되고 선봉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야간을 이용한 기습전을 전개하였다. 공의 첫 전투는, 채유희․유종 형제와 함께 상주 북쪽 숲속 만갈산(현, 만산동)에 주둔한 왜적을 습격하여 적진을 흔드니 왜적은 황급히 상주성으로 들어가 북문을 닫고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를 본 채유희는 공을 중국의 조자룡(趙子龍)에 비유하였다.
다시 황령으로 이동하여 복병중인 적을 강궁(强弓)으로 난사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적이 기담(은척 황령)을 거쳐 탄연(가은 수예)으로 달아나자 추격하여 이들을 연못으로 밀어 넣어 죽이니 그 못을 감왜연(坎倭淵)이라 하였다.
군량이 부족하자 단신으로 함창 사창에 가서 낮잠을 자는 왜적을 돌로 쳐서 죽이고 쌀 석섬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9월에는 용력이 뛰어난 외다리 적장을 토천산에서 만나자 이를 비탈길로 유인하여 장창(長槍)을 빼앗고 죽였다. 다시 신원(문경 마성 새원)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죽이기도 하였다.

다. 인후지지인 당교전투 승리에 기여
지난 날, 함창 윤직2리의 당교(뗏다리, 때다리)는 군사 전략상 가장 요충지로서 인후지지(咽喉之地, 사람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땅)라 하였다. 이곳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고, 동래 쪽과 안동으로 길이 갈라지는 길목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도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군이 철군하지 않고 계속 주둔을 하자 당의 야심을 알아차린 신라는 김유신장군이 섬멸시킨 후 ‘당나라 군인의 때죽음’에서 연유하여 ‘당교’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당교사적비’가 문경시청에 전정에 세워져 있다.
임란 때에도 왜적들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주변지역에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1592년 11월 공은 정병(精兵) 50명을 이끌고 밤에 습격하여 100여 명의 왜적을 죽이고 우마 17필과 수레를 빼앗았다. 다시 정범례(鄭範禮) 등과 기습전을 벌여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593년 2월에도 의병대장 이봉(李逢)과 함께 기습하여 승리하였고, 2월 11일 밤에는 상주 가판관 정기룡(鄭起龍)과 연합전선을 벌여 왜적 수백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부터 당교를 완전 장악하니 함창, 신원, 탄령 등에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이렇듯 공은 창의진의 선봉장으로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왜적을 무려 5천 급의 목을 베는 등 수 많은 전과기록이 있다.

Ⅲ. 향리에 남긴 유적과 업적
가. 선무원종공신녹권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란, 임진왜란 때 나라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된 사람들에게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공신 증서이다. 이는, 임진왜란 후 전공(戰功)이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인물들로서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임란 때 무공과 명나라 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 중 공이 있는 문무관. 이순신 등 18명 녹훈]에 들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1605년(선조 38)년 4월에 9,060인을 녹훈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목활자본으로 총 208쪽이며. 4주쌍변(四周雙邊)이다.
첫머리에 ‘선무원종공신녹권’이라는 명칭이 있고, 이 녹권을 발급 받는 개인의 신분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다음에 도승지 신흠(申欽, 1566∼1628, 문정공)을 통하여 공신도감에서 녹훈에 대한 전지(傳旨, 임금의 윤허가 내린 글)를 실었다.
전지(傳旨)에는 공신에게 내리는 특권이 기록되어 있다. 1등은 1계(階, 계급)를 올려 주고 자손이 음직(蔭職)에 나아가게 하고 부모를 봉작(封爵)하며, 2등은 1계(階)를 올려주고 자손이 음직에 나아가게 하고 자손 중 한 사람에게 산관[散官, 일정한 관직이 없고 관계(官階)만을 보유하던 관원] 1계(階)를 올려주며, 그 중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 사위, 생질 중의 한 사람을 산관(散官) 1계를 올려주며, 3등은 부모를 봉작하고 1계를 올려주고 자손이 음직에 나아가게 한다. 또한, 각 등(等)의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당하관) 이상인 자에게는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 사람에게 산관(散官) 1계를 올려 주고, 죽은 자는 추증(追贈)하여 1계를 올려 주었다. 죄를 지어 산관이 된 자는 본 품계에 서용(敍用)하고, 오래도록 서용되지 못한 자는 허통(許通)하여 출사(出仕)의 길을 열어주고, 직첩(職帖)을 거두어들인 자는 직첩을 환급해 주고, 첩의 자식은 한품(限品)에 서용하고, 공사천구(公私賤軀)는 면천하는 등 특전을 주었다.
당시 선무공신도감에 관원의 명단은, 당상 호성공신 오성(鼇城) 부원군 이항복(李恒福), 당상 호성공신 연릉(延陵) 부원군 이호민(李好閔), 당상 호성공신 의정부 우참찬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당상 선무공신 호조참판 길창군(吉昌君) 권협(權悏)이며, 낭청(郎廳, 실무 관직) 통례원 좌통례 김권(金權), 감교낭청(監校郎廳) 행 한성부 서윤(庶尹, 종4품) 신점(申점), 감교낭청 충무위 부사과(副司果, 종6품) 이계남(李桂男)으로 기록되어 있다.
1등 공신은, 임해군 진(珒, 광해군 첫째 서자, 추후 역모로 몰려 삭탈되어 녹권에는 지워져 있음)을 비롯하여 정원군(定遠君) 부[선조(宣祖)의 아들로 이로 인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 순화군(順和君) 두(선조의 6子, 포악하여 군호를 박탈 당하였으나 이로 복작됨) 등이 12명이고, 지중추부사 송언진, 풍원부원군 류성룡...행 부사 정기룡...정(正) 김옥(金玉)...정(正) 김사종(金嗣宗)...정(正) 이축(李軸)...절충 김축(金軸) 정(正) 이봉(李逢)...전 참의 정경세(鄭經世) 등이 ‘등을량선무원종공신 1등(等乙良宣武原從功臣一 等)’에 녹훈되었고, 2등은 첨사(僉使) 황세득(黃世得)...판관 김광폭(金光輻)...정(正) 김각(金覺)...목사 김홍민(金弘敏) 등이 ‘등을량선무원종공신 2등(等乙良宣武原從功臣二 等)’에, 3등은 관노(館奴) 상경(祥慶)...정(正) 노함(盧함)...부정(副正) 곽응화(郭應華)...주부 김혜(金寭) 등이 ‘등을량선무원종공신 3등(等乙良宣武原從功臣三 等)’에 녹훈되어 이 녹권에는 총 9,060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녹권의 1등에 있는 정(正) 이축(李軸)은 가악재로서, 지정 당시의 벼슬이 훈련원(訓練院) 정(正)으로, 이는 정3품의 당하관이다. 그러나, 일부 문헌에는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양녕대군의 현손) 이축(李軸)을 1등으로 소개된 문헌이 있으나 이분은 2등에 책록되어 있으며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가악재가 1등 공신임을 밝혀 둔다.
여기에는 왕자, 부마, 종친에서부터 중앙관, 지방관, 허통(許通), 면역, 보인(保人, 군역을 하는 정군의 경제적 보조자),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이 망라되어 있는데, 상주 출생과 관련된 인물은 30여 명 내외이고, 상주의 목민관 출신도 14명(1명 중복)이나 된다.
이 문서는 임란 후에 피폐해진 각 향촌 사회들의 흐트러진 민심을 순화시키고 민풍을 바로잡기 위한 왕정의 노력이 담겨져 있는 아주 귀한 고문서를 보관해 오고 있다.

나. 문집 - 가악재 실기
가악재실기(佳岳齋實記)는 문집으로, 서문(序文)을 1816년(순조 16) 5월에 함양 박주종(朴周種)이 지었으나, 1915년에 발간하였다. 공의 행적에 비해 문헌이 적어 ‘임진 전란사서’와 검간 조정선생의 년보와 일기 중에서 발췌한 후, 후손들이 년보, 일고(逸稿), 시(詩), 서(書), 행장(行狀) 등의 순으로 편집하여 1983년에 번역문을 넣어 중간하였다. 이 실기는 공의 행적을 조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다. 교지류
후손 건수(健守)씨가 보관해 온 교지류 총 7매이다. 증직(贈職) 교지가 3매, 품목(稟目) 교지가 4매이다.
증직 교지는 1886년(관서 12) 2월에 내려졌는데, ‘통훈대부 행 옥천군수 겸 청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 이축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정3품) 자’이다. 가로 82㎝, 세로 66㎝이다. 그리고, 공의 처(妻)를 숙부인, 정부인(貞夫人, 정3품)에 대한 증직 교지가 있다. 품목(稟目, 행사전 관청에 여쭙는 문서)으로 1779년(정조 3) 함창현감에게 경충사 유사 이중익(李重翊)이 향례를 청원하는 내용을 적은 것으로서, 이는 1845년(유사 이정팔 李楨八, 이정선 李楨鮮), 1859년(유사 이종숭 李重述, 이병순 李秉淳), 1861년(유사 이정달 李楨達, 이기섭 李起燮) 등 4종의 품목을 보존하고 있다. 이 모두가 귀중한 고문서 이다.

라. 신도비
신도비(神道碑)는 흑암1리와 2리 사이 마을 어귀에 있으며, 1962년에 세웠다. 비명은 “가악재 이선생 신도비”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는 화강암이며, 비신은 오석으로 총 높이가 4m이다. 이수에는 운문(雲紋)에 쌍용을 조각해 놓았고 글 지은이는 진성 이상호(李祥鎬)이다.

마. 경충사(사당)
경충사(景忠祠)는 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는 사당으로 흑암 2리에 있다. 노년에 대가산 아래에 가악재(佳岳齋)란 정자를 짓고 은거한 곳이라 하나 본래의 건물은 없어지고 1871년(고종 8)에 경충사를 세워 추모해 오다가 1958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참봉 정상진(鄭象晉)이 지은 상량문과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중건기가 있다.
사당 앞의 가악재실과 강당인 영모당(永慕堂)은 좌우 온돌방을 두었고, 천정은 연목천정이다.
그러나, 위 품목(稟目)에 의하면, 1779년(정조 3)에 향례를 올렸으니 그 이전에 건립되었음이 새로이 입증된다.

마. 방호정(傍湖亭)
흑암1리에 있다. 가악재의 6세손인 가선대부 중추부 동지사(종2품) 이성정(李星井, 1676∼?)이 방호정사(傍湖精舍)를 세운 후 마을 이름을 호산(湖山)이라 명하였다. 그 후 1935년(乙亥) 7대손 기호(基鎬)가 중건하고 이름하였으며, 송준필(宋浚必)이 지은 기문이 있다. 이 방호정 앞에는 호수가 있고 이 호수에는 연꽃이 있다.

공은 천부의 자질로 충효를 겸비하였으며, 창의군의 선봉장으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5,000여 급의 적을 죽였으니 이에 대해 백성들의 어육(魚肉)됨도 면하면서, 함창․이안 일원을 지켜낸 실로 위대한 무장이었다.
무록(無祿)의 선비와 백의(百衣)의 민초(民草)들이 스스로 모여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을 구해 낸 장본인들로서, 유구한 역사와 함께 현창(顯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이 쌓여 선조 임금은 상주 전역에 복호(復戶, 조세 일부 및 부역의 면제)를 내렸으리라.

 

출처-이안면

 

이안면 / 흑암리(黑岩里) / 이축묘(李軸墓) /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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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2-23 11:41:45 131
 
 

명산탐방대가 2018. 2. 4. 20:37

* 등산지 : 대가산(경북 상주시 이안면 흑암리)과 이축선생 묘역

* 등산인 : 문장대 부부

* 등산일 : 2018년 2월 4일(일)

*  오늘 2024년 1월 18일 현재부터 6년전에 집사람과 우리 조상 이축 선생님의 글을 다시 올립니다. 이축선생님은 당시 왜적5,000명(오천명)을 처치한 용장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전후무후한 용장입니다.

이안면 / 흑암리(黑岩里) / 이축 신도비(李軸神道碑) /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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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9-12-23 11:41:4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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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리 174번지인 대가 마을과 호산 마을 사이 도로 가에 있다.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 일등인 이축의 신도비로, 1962년 정월 보름에 세웠다. ‘가악재이축신도비(佳岳齋李軸神道碑)’라 되어 있고, 진성 이상호(眞城 李祥鎬)가 찬(撰)하고 이원기(李源箕)가 서(書), 장종환(張鍾煥)이 전(篆)하였다. 비 전체 높이 400cm. 비신 230cm. 비신 폭 80cm. 비신 두께 45cm. 비수 높이 100cm. 비수 폭 58cm. 귀부 높이 80cm다.

  상주 사벌면에는 매악산, 마리산, 군암산, 금지산(견지산)을  주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데,  상주시 이안면에서는  숭덕산, 대가산을 중히 여기고 있다. 숭덕산은 지맥 산행때 탐방했으나 바로 옆에 위치한 이안면 흑암리 대가산은 빼어난 산수의 명산인데도 등산인들은 그냥 지나가기만 한다. 오늘 상주시 이안면에 존재하는 대가산과 그 산밑 이축선생님 묘역과 그아래 여러 건물을 답사했다. 이축선생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별도로 아래 게재했다. 새남골, 지산, 흑암,여물 동네가 대가산 아래 존재한다. 325미터의 작은 산이지만 막상 정상에 오르면 사방 상주, 문경 , 의성, 보은,괴산,의성의 유명산들을 모두 조망되는 명산이다.

 

  원거리 계시는 수많은 등산가들의  대가산과 주변 등대산을 연계하여 탐방한 산행기를 여러차례 보았고, 인근 산을 등산하면서 빼어난 경관에 호기심을 유발하여, 상주자택을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상주시 이안면 흑암리에 도착했다. 먼저 이축선생 묘역과 사당이 있는 넓은 터에 주차하고 경충제  등 여려 건물을 관람하고 뒷산의 묘지에 올라 참배했다. 임진왜란때 창의군의 선봉장으로 수천명의 왜적을 섬멸시킨 선생님은 전란후 공신에 올랐고, 부여현감과 옥천군수를 역임한 문관 겸 무관이다. 이분은 성주이씨의 후예로 문장대 선조이시다. 부모님으로부터 어릴때 이축선생님의 활약상을 대략 들었으나, 그동안 잊고 살다가 오늘 모처럼 참배하고 선조님의 약력을  다시 공부했다.  현지도착해서 30분 정도 묘역 주변을 둘러보다가 뒷산 솔봉으로 치고 올랐다. 이 등산로는 정식 등산로가 아니라 까시 둥치가 많아 오르기가 힘들었다. 약간의 등로는 보이지만 등산인의 발자취가 뜸해서 나무사이를 요리조리 피해다녀야 했고, 급경사는 거의 절벽수준이라 5미터 오르면 1미터 미끄러지고 10미터만 올라도 숨이차서 산 중턱까지 나무와 나무를 잡고 수십번 미끄러지며고,여러차레  쉬어가며 숨을 몰아치기도 했다.

  급경사를 치고 능선으로 향하니 정식 등산로가 나타난다. 소나무 재선충병에  걸린 나무를 훈증하기위해 비닐로 봉한 파란 나무무덤이 종종 나타나 그쪽으로 오르니 등산로이다. 이축선생의 묘역 뒤로 오르는 것보다 마을 안길을 통과하여 마지막 큰창고 옆 시멘트 임도길을 오르는 것이 정식 등산로이다. 묘지를 가는 임도로 가더보면 정상오르는 길이 이어진다. 마을옆 끝에서 산줄기로 올라가 4개의 봉우리를 넘어도 정상가는 길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처음산행하는 분은 마을 주민에게 문의하게 오르는게 덜 고생한다. 나처럼 이축선생 묘역으로 오르면 고생한다. 오르는 동안 마을 견공이 산 중턱까지 따라온다. 고마워서 과자를 주니 웬일인지 줄행랑이다. 급경사를 올라 고생좀하다가 가까스로 능선에 도착해서 등산로를 따라오르니 비교적 쉽게 정상까지 올랐다. 산높이가 325미터이니 큰고생은 없고 다만 자주 쉬었다. 어떤 산이던 정상 도착전에은 항상 산들이 등산인들을 고생시킨다. 금방이라도 도착할 같지만 오르면 또 아니고 해서 여러번 고통을 겪어야 정상을 보여준다. 백두대간이나 다른 명산 다닐때도 명산들은 항상 고생시키고 정상을 보여준다. 작은 야산이라도 명산들은 나름대로 오르는게 다소 고생이다.  30분 묘역구경하고, 30분 벼랑같은 오르막을 올라 등산로에 도착하고 30분동안 힘든 정식 등산로를 올 수십번 쉬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인 대가산에 도착하니 멋진 돌표지석과 노간주나무가 자리하고 문경쪽 농암통로, 이안천과 함창들이 보이고 작약산, 갑장산, 금지산, 국사봉 등 유명한 명산들이 병풍처럼 보여 지상천국이다. 조금만 고생하면 이런 멋진 천국을 구경하고, 맑은 청정공기를 마시며, 성인병 등 여러 병에 이환되는것을 막아준다. 물론 체력도 좋아지고, 건전한 정신을 갖게해주는 운동이다. 상주시민들도 이 대가산을 아는 분이 거의없다. 차라리  서울, 부산, 대구 대전에 사시는 등산인들이 대가산을 더 많이 답사한다. 총 2시간 정도 3-4키로의 거리를 답사한 하루였다. 이축선생 묘역과 대가산 산행시 촬영한 사진을 올려봅니다. 이축선생의 약력은 사진아래 올립니다.  

 

 

붉은선은 흑암리 이축선생 묘역아래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주변 건물과 묘역을 참배하고 소나무가 우거진 뒤산으로 올랐다. 거의절벽 수준으로 고행길.

노랑선은 정식 등산로를 따라 하산함. 동네 안길로 들어가 큰창고 앞으로 등산길-  처음에는 주민에게 문의요망-여러 경로가 다소했갈림- 표지기가 전혀 없음.

 

 

 

지난해 새로단장한  큰대문

 

 이축선생 묘역- 저기 묘지뒤  소나무 뒷산으로 치고오르면 고생이 많음

 

 

 이축선생을 모신 경충사 (사원보다 격이 격이 낮은 건물)

가악재 이선생 시비 7언절귀

 

명산십리 취동서.   백석청계  녹점애.      로전봉회 유격처.      심한신일 일옹서.

 

 

 

 

 부여현감과 옥천군수를 역임한 문무 겸 관리- 임진왜란 창의군 선봉장으로 수천명 왜적을 섬멸함-아래 약력 참고--고려말의 이축과는 동명이인 입니다.

 

 동네전경

 

 

멋진 운지버섯

 

 

 

 

 

 

 

 1시간 고초끝에 오른 정상- 비정규 등산로로 올라서 고생함  대가산 정상

멋진 노간주나무와 돌 표지석

 

 정식 등산로는 이리좋네요.

 

 

 정상에 붙어있는 등산인 표지기

 

  노송이 천년송 방불

하산시 우리문중 어르신 묘지-이정표역할

 마을 끝 산아래  시멘트 농로가 여기서 마침

 이마을에서 가장 큰 창고 바로 앞까지 와서 산으로 오르는 길로 가면  정식등산로입니다.

창고앞 등산길

 

 

다음 부터는 조선 선조때 이축선생 약력과 그분에 관한 해설입니다.

 

이축선생 약력

시대출생사망경력유형관련 사건직업성별분야본관
조선
1565년
1647년
부여현감, 옥천군수
인물
임진왜란
학자, 의병장
종교·철학/유학
성주(星州)

요약 1565(명종 20)∼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덕재(德載), 호는 가악재(佳岳齋). 함창 출신. 아버지는 장례원판결사 이응춘(李應春)이며,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어 무예에 숙달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4년(선조 17) 효행으로 천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령(黃嶺)에서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이 되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1596년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부여현감에 임명되었다.

뒤에 옥천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훈련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대가산(大佳山) 아래 정사(精舍)를 짓고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뒤에 경충사(景忠祠)에 제향되었다.

 

위자료 이축선생 자료는 아래 문헌에서 초록한 내용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참고문헌

  • 『가악재실기(佳岳齋實記)』
  • 『선조실록(宣祖實錄)』
  • 다음부터는 상주시홈페이지에 실린 이축선생님 약력소개입니다.

 

이축선생님 묘역은 흑암리 산23번지에 있다. 이축(李軸)은 조선 명종 20년(1565) 함창현 대가리에서 태어나 인조 25년(1647)에 졸했다. 호는 가악재(佳岳齋)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황령사(黃嶺寺)에서 창의하여 정경세(鄭經世)를 상주 소모관(召募官), 이축을 돌격 선봉대장으로 하여 함창 당교에 있던 왜진(倭陣)과 싸우고 고담(姑潭). 개령(開寧) 등에서 싸웠다. 묘역은 약 40평이다. 고려말 도은선생의 아들 이축선생은 별도 인물이다.

  ------------------------------------------------------------------------------------------------------- 임란 창의군의 선봉장 - 가악재 이축 Ⅰ. 공의 생애와 업적 가. 가계와 생애 가악재(佳岳齋) 이축[李軸, 1565(명종 20)∼1647(인조 25)]은 임진왜란 때 함창지역에서 일어난 창의군의 선봉장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덕재(德載), 가악재는 호이다. 임진왜란때 함창지역에서 봉기한 의병 즉, 창의군(昌義軍)의 선봉장으로 많은 공을 세워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시조인 통일신라시대 재상을 지낸 순유(純由)로 부터 24세손이고, 중시조 장경(長庚)의 13세손이다. 공의 11대조는 고려말 문신인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다. 아버지 장예원 판결사(종2품) 응춘(應春)과 어머니 함창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지모와 용력이 남달랐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효심이 지극하였다. 9세에 소학을 필독하고, 12세에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20세에 지극한 효성이 자자하자 현감이 도백에게 보고하여 포상코자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기도 하였다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은척면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이때 의병대장은 이봉)을 맡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 공으로 1605년(선조 38)인 41세 때에 선무원종공신록권 1등에 책록되었다. 나. 출사와 관력 임란때 창의 거병한 공적이 많았으나 이때는 양친의 상복(喪服)으로 은명(恩命)을 유보하여 출사하지 못하다가 32세인 1596년(선조 29) 정월에 부여현감으로 제수되었다(의병대장 이봉은 바로 괴산군수에 제수되었다). 재임 중에 고을의 백호(白虎)가 나타나 직접 잡으니 백성들이 탄복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또 옥천군수(종4품)로 부임하였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597년(선조 30)에 훈련원(訓練院) 정(正, 정3품, 당하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인 이안면 흑암리 대가산 아래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뒤에 경충사에 제향되었다. Ⅱ. 임진왜란과 의병활동 가. 임진왜란과 상주 풍신수길이 육군 15만 명과 수군 9천 명으로 1592년 4월 13일 정명가도를 구실삼아 우리나라를 침략한 임진왜란은 전국토를 유린하면서 그 참화는 역대 전란사 중 피해가 가장 큰 전쟁이었다. 왜적의 침공 사실이 4월 17일에야 조정에 보고되자 비로소 군마를 조발하는 등 특단의 대책을 세웠으나 설상가상이었다. 형조참의로 있던 김성일을 경상도 병마사로 특배하고, 그가 상주를 지나면서 급보를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명하여 항전토록 하였다. 순변사 이일은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하여 군대를 편성하니 급조한 군대라 전투를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당시의 전술인 제승방략(制勝方略, 고을마다 통첩을 보내어 서울에서 오는 장수를 기다려 지휘를 받는 전투법)에 따라 상주진의 군대는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의 명에 따라 4대(隊)로 편성하여 대구로 진군시켰다. 그러나, 이미 4월 24일에는 적이 선산에 있었고, 4월 25일에는 소서행장이 이끄는 주력군 15,000여 명이 상주성을 공격하니 우리 군대는 미쳐 배치도 끝나기 전이나 모두 결사 항전하였지만, 결국은 상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순변사 이일과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도망을 갔으나 상주판관 권길(權吉), 중앙군의 종사관(從事官)과 상주 백성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지만 모두 장열히 순국하였다. 이 전투는 조선의 중앙군이 왜군과 대결한 공식적인 최초의 전쟁이다. 그러나, 이 나라 이 겨레를 보전하게 하고 결국 왜란의 종지부를 찍게 한 주인공이 있었으니 바로 무록(無祿)의 선비요, 백의(百衣)의 민초(民草)들 이었다. 왜적의 약탈과 방화는 상주의 선조들을 결속시켜, 결국 함창지역에는 창의군(昌義軍)이, 상주와 외남지역에서는 상의군(尙義軍)이, 보은과 속리산에서는 충보군(忠保軍)이 조직되어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나. 함창지역 의병의 선봉장 - 가악재 이축 상주성이 함락되고 북진을 한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함창에서 가장 먼저 의병활동이 시작되었다. 1592년 7월 26일 채유희(蔡有喜), 유종(有終) 형제는 먼저 격론을 발했다. 상주의 제현인 정경세, 조정, 권경호와 사인 이홍도 등과 더불어 은척 황령사에서 거병하기로 한 후, 채유희는 이홍도와 함께 청주에 사는 외숙인 이봉(李逢)을 의병대장으로 모셔 왔다. 20여 명의 산척(山尺)을 데리고 이봉은 7월 30일 황령사에서 100여 명이 모여 의기(義旗)를 꽂고 창의군(昌義軍)을 결성하였다. 8월 1일에는 의병소를 설치하고 가악재를 선봉장(先鋒將)으로 삼았으니(조정 임란일기) 이때 공은 28세로 혈기 왕성할 때였다. 전패(殿牌) 앞에서 회곡거의(會哭擧義)를 하고 4가지 군약(軍約)을 제정 공포하였다. 8월 2일에는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에게 오해를 염려하여 통문하였다. 이국필은 창의군의 조직부터 11월까지 의병활동을 방해하였으나 창의군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가악재실기』에 의하면, 4월 하순에 양친을 황령사로 피신시키고, 기회를 엿보고 습격하여 왜병 수명을 참살시켰다. 또한 왜적이 돌연히 이안땅으로 몰려오자 미쳐 피난을 하지 못한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홀로 돌진하여 창(槍)을 좌우로 휘두르면서 크게 호령하니 그의 용력에 눌려 적세가 크게 꺾이자 이 틈을 이용하여 주민들을 대피시켰으며, 6월에는 당교에 주둔하는 왜적에게 꿀과 떡으로 유인하여 농병(농餠, 이는 신라 김유신장군의 전법임)을 만들어 독살시켜 조령과 상주의 길목을 끊음으로써 적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였다. 그 후 창의진이 결성되고 선봉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야간을 이용한 기습전을 전개하였다. 공의 첫 전투는, 채유희․유종 형제와 함께 상주 북쪽 숲속 만갈산(현, 만산동)에 주둔한 왜적을 습격하여 적진을 흔드니 왜적은 황급히 상주성으로 들어가 북문을 닫고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를 본 채유희는 공을 중국의 조자룡(趙子龍)에 비유하였다. 다시 황령으로 이동하여 복병중인 적을 강궁(强弓)으로 난사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적이 기담(은척 황령)을 거쳐 탄연(가은 수예)으로 달아나자 추격하여 이들을 연못으로 밀어 넣어 죽이니 그 못을 감왜연(坎倭淵)이라 하였다. 군량이 부족하자 단신으로 함창 사창에 가서 낮잠을 자는 왜적을 돌로 쳐서 죽이고 쌀 석섬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9월에는 용력이 뛰어난 외다리 적장을 토천산에서 만나자 이를 비탈길로 유인하여 장창(長槍)을 빼앗고 죽였다. 다시 신원(문경 마성 새원)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죽이기도 하였다. 다. 인후지지인 당교전투 승리에 기여 지난 날, 함창 윤직2리의 당교(뗏다리, 때다리)는 군사 전략상 가장 요충지로서 인후지지(咽喉之地, 사람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땅)라 하였다. 이곳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고, 동래 쪽과 안동으로 길이 갈라지는 길목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도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군이 철군하지 않고 계속 주둔을 하자 당의 야심을 알아차린 신라는 김유신장군이 섬멸시킨 후 ‘당나라 군인의 때죽음’에서 연유하여 ‘당교’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당교사적비’가 문경시청에 전정에 세워져 있다. 임란 때에도 왜적들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주변지역에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1592년 11월 공은 정병(精兵) 50명을 이끌고 밤에 습격하여 100여 명의 왜적을 죽이고 우마 17필과 수레를 빼앗았다. 다시 정범례(鄭範禮) 등과 기습전을 벌여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593년 2월에도 의병대장 이봉(李逢)과 함께 기습하여 승리하였고, 2월 11일 밤에는 상주 가판관 정기룡(鄭起龍)과 연합전선을 벌여 왜적 수백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부터 당교를 완전 장악하니 함창, 신원, 탄령 등에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이렇듯 공은 창의진의 선봉장으로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왜적을 무려 5천 급의 목을 베는 등 수 많은 전과기록이 있다. Ⅲ. 향리에 남긴 유적과 업적 가. 선무원종공신녹권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란, 임진왜란 때 나라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된 사람들에게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공신 증서이다. 이는, 임진왜란 후 전공(戰功)이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인물들로서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임란 때 무공과 명나라 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 중 공이 있는 문무관. 이순신 등 18명 녹훈]에 들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1605년(선조 38)년 4월에 9,060인을 녹훈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목활자본으로 총 208쪽이며. 4주쌍변(四周雙邊)이다. 첫머리에 ‘선무원종공신녹권’이라는 명칭이 있고, 이 녹권을 발급 받는 개인의 신분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다음에 도승지 신흠(申欽, 1566∼1628, 문정공)을 통하여 공신도감에서 녹훈에 대한 전지(傳旨, 임금의 윤허가 내린 글)를 실었다. 전지(傳旨)에는 공신에게 내리는 특권이 기록되어 있다. 1등은 1계(階, 계급)를 올려 주고 자손이 음직(蔭職)에 나아가게 하고 부모를 봉작(封爵)하며, 2등은 1계(階)를 올려주고 자손이 음직에 나아가게 하고 자손 중 한 사람에게 산관[散官, 일정한 관직이 없고 관계(官階)만을 보유하던 관원] 1계(階)를 올려주며, 그 중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 사위, 생질 중의 한 사람을 산관(散官) 1계를 올려주며, 3등은 부모를 봉작하고 1계를 올려주고 자손이 음직에 나아가게 한다. 또한, 각 등(等)의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당하관) 이상인 자에게는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 사람에게 산관(散官) 1계를 올려 주고, 죽은 자는 추증(追贈)하여 1계를 올려 주었다. 죄를 지어 산관이 된 자는 본 품계에 서용(敍用)하고, 오래도록 서용되지 못한 자는 허통(許通)하여 출사(出仕)의 길을 열어주고, 직첩(職帖)을 거두어들인 자는 직첩을 환급해 주고, 첩의 자식은 한품(限品)에 서용하고, 공사천구(公私賤軀)는 면천하는 등 특전을 주었다. 당시 선무공신도감에 관원의 명단은, 당상 호성공신 오성(鼇城) 부원군 이항복(李恒福), 당상 호성공신 연릉(延陵) 부원군 이호민(李好閔), 당상 호성공신 의정부 우참찬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당상 선무공신 호조참판 길창군(吉昌君) 권협(權悏)이며, 낭청(郎廳, 실무 관직) 통례원 좌통례 김권(金權), 감교낭청(監校郎廳) 행 한성부 서윤(庶尹, 종4품) 신점(申점), 감교낭청 충무위 부사과(副司果, 종6품) 이계남(李桂男)으로 기록되어 있다. 1등 공신은, 임해군 진(珒, 광해군 첫째 서자, 추후 역모로 몰려 삭탈되어 녹권에는 지워져 있음)을 비롯하여 정원군(定遠君) 부[선조(宣祖)의 아들로 이로 인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 순화군(順和君) 두(선조의 6子, 포악하여 군호를 박탈 당하였으나 이로 복작됨) 등이 12명이고, 지중추부사 송언진, 풍원부원군 류성룡...행 부사 정기룡...정(正) 김옥(金玉)...정(正) 김사종(金嗣宗)...정(正) 이축(李軸)...절충 김축(金軸) 정(正) 이봉(李逢)...전 참의 정경세(鄭經世) 등이 ‘등을량선무원종공신 1등(等乙良宣武原從功臣一 等)’에 녹훈되었고, 2등은 첨사(僉使) 황세득(黃世得)...판관 김광폭(金光輻)...정(正) 김각(金覺)...목사 김홍민(金弘敏) 등이 ‘등을량선무원종공신 2등(等乙良宣武原從功臣二 等)’에, 3등은 관노(館奴) 상경(祥慶)...정(正) 노함(盧함)...부정(副正) 곽응화(郭應華)...주부 김혜(金寭) 등이 ‘등을량선무원종공신 3등(等乙良宣武原從功臣三 等)’에 녹훈되어 이 녹권에는 총 9,060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녹권의 1등에 있는 정(正) 이축(李軸)은 가악재로서, 지정 당시의 벼슬이 훈련원(訓練院) 정(正)으로, 이는 정3품의 당하관이다. 그러나, 일부 문헌에는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양녕대군의 현손) 이축(李軸)을 1등으로 소개된 문헌이 있으나 이분은 2등에 책록되어 있으며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가악재가 1등 공신임을 밝혀 둔다. 여기에는 왕자, 부마, 종친에서부터 중앙관, 지방관, 허통(許通), 면역, 보인(保人, 군역을 하는 정군의 경제적 보조자),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이 망라되어 있는데, 상주 출생과 관련된 인물은 30여 명 내외이고, 상주의 목민관 출신도 14명(1명 중복)이나 된다. 이 문서는 임란 후에 피폐해진 각 향촌 사회들의 흐트러진 민심을 순화시키고 민풍을 바로잡기 위한 왕정의 노력이 담겨져 있는 아주 귀한 고문서를 보관해 오고 있다. 나. 문집 - 가악재 실기 가악재실기(佳岳齋實記)는 문집으로, 서문(序文)을 1816년(순조 16) 5월에 함양 박주종(朴周種)이 지었으나, 1915년에 발간하였다. 공의 행적에 비해 문헌이 적어 ‘임진 전란사서’와 검간 조정선생의 년보와 일기 중에서 발췌한 후, 후손들이 년보, 일고(逸稿), 시(詩), 서(書), 행장(行狀) 등의 순으로 편집하여 1983년에 번역문을 넣어 중간하였다. 이 실기는 공의 행적을 조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다. 교지류 후손 건수(健守)씨가 보관해 온 교지류 총 7매이다. 증직(贈職) 교지가 3매, 품목(稟目) 교지가 4매이다. 증직 교지는 1886년(관서 12) 2월에 내려졌는데, ‘통훈대부 행 옥천군수 겸 청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 이축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정3품) 자’이다. 가로 82㎝, 세로 66㎝이다. 그리고, 공의 처(妻)를 숙부인, 정부인(貞夫人, 정3품)에 대한 증직 교지가 있다. 품목(稟目, 행사전 관청에 여쭙는 문서)으로 1779년(정조 3) 함창현감에게 경충사 유사 이중익(李重翊)이 향례를 청원하는 내용을 적은 것으로서, 이는 1845년(유사 이정팔 李楨八, 이정선 李楨鮮), 1859년(유사 이종숭 李重述, 이병순 李秉淳), 1861년(유사 이정달 李楨達, 이기섭 李起燮) 등 4종의 품목을 보존하고 있다. 이 모두가 귀중한 고문서 이다. 라. 신도비 신도비(神道碑)는 흑암1리와 2리 사이 마을 어귀에 있으며, 1962년에 세웠다. 비명은 “가악재 이선생 신도비”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는 화강암이며, 비신은 오석으로 총 높이가 4m이다. 이수에는 운문(雲紋)에 쌍용을 조각해 놓았고 글 지은이는 진성 이상호(李祥鎬)이다. 마. 경충사(사당) 경충사(景忠祠)는 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는 사당으로 흑암 2리에 있다. 노년에 대가산 아래에 가악재(佳岳齋)란 정자를 짓고 은거한 곳이라 하나 본래의 건물은 없어지고 1871년(고종 8)에 경충사를 세워 추모해 오다가 1958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참봉 정상진(鄭象晉)이 지은 상량문과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중건기가 있다. 사당 앞의 가악재실과 강당인 영모당(永慕堂)은 좌우 온돌방을 두었고, 천정은 연목천정이다. 그러나, 위 품목(稟目)에 의하면, 1779년(정조 3)에 향례를 올렸으니 그 이전에 건립되었음이 새로이 입증된다. 마. 방호정(傍湖亭) 흑암1리에 있다. 가악재의 6세손인 가선대부 중추부 동지사(종2품) 이성정(李星井, 1676∼?)이 방호정사(傍湖精舍)를 세운 후 마을 이름을 호산(湖山)이라 명하였다. 그 후 1935년(乙亥) 7대손 기호(基鎬)가 중건하고 이름하였으며, 송준필(宋浚必)이 지은 기문이 있다. 이 방호정 앞에는 호수가 있고 이 호수에는 연꽃이 있다. 공은 천부의 자질로 충효를 겸비하였으며, 창의군의 선봉장으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5,000여 급의 적을 죽였으니 이에 대해 백성들의 어육(魚肉)됨도 면하면서, 함창․이안 일원을 지켜낸 실로 위대한 무장이었다. 무록(無祿)의 선비와 백의(百衣)의 민초(民草)들이 스스로 모여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을 구해 낸 장본인들로서, 유구한 역사와 함께 현창(顯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이 쌓여 선조 임금은 상주 전역에 복호(復戶, 조세 일부 및 부역의 면제)를 내렸으리라.

 

<상주시  홈페이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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