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이안천 걷기

이안천 걷기 : 우복 종택(상주시)

문장대 2023. 11. 14. 18:04

* 이동지역 :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보건지소 3거리-우산공원 석장승-조선 선조시대 문신 우복 정경세 선생님 종택-계정, 대산루-우산서원- 대형 상수도 물탱크-임도-종가집 뒷산 진입-능선도착-300m봉-400m봉-바위지대서 독점오리농장 조망- 송이버섯 지역 표시 흰줄 따라 하산-위험 바위지대 도착-흰줄 없어짐-막산타고, 낙엽타고 하산- 동네 개소리 듣으며 하산-염소 농장 부부 주민 만남-우산종택 가는길 정보 도움 받음-시멘트 징검다리 건너-구마이, 우서로 버스 도로 진입-이안천과 도로따라 이동-무진암 도착-이안천 종택 부근서 우복 종택 종부 우연히 만남-우산종택까지 종부와 우복선생과 후손 애기하며 이동-종부의 삶을 잠시 경청-종손 정춘목씨는 출타중-종택 주차장 도착-차 한잔하고 가라는 종부의 권유 감사-종택출발-우산공원-큰마을 병암고택 촬영-마을회관 촬영-우산 보건지소 출발 -상주자택 20분만에 도착.
 
 
* 종택답사와 뒷산 등산 내용 : 상주출신의 대유학자 이며 정치가인 우복 정경세 선생님에 관한 글은 며칠전에 본 이종하 등산기에 올린 바 있습니다. 근래 상주의 야산을 등산하다가 우연히 만난 후손 입재 정종로 선생님의 묘소를 관현리 고븟재 아래서 발견하고 묘소가  다소 무너진 곳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그 다음날 다시 약간의 보수와 입재 선생님의  묘지가 맞는가 확인이라도 할려고 갔다가 때마침 시제를 지내는 후손들을 만나 여러 사실을 알았고 이후 관심을 가져 자료를 수집하여 이종하 등산기에 두분 우복대감과 후손 입재선생님의 일대기를 요약 발표하였다. 오늘은 이곳에서 정선생님이 잠시 살았고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면서 정씨 가문을 빛내고 이어준 우복종택을 방문하였다. 필자가 20년전 교직에 있을대 학생들과 이곳을 자주오긴 했으나 그당시는 큰 생각없이 정대감은 중앙에서 벼슬하신분이고 그분이 살던 곳이다라고 생각하고 설명도 했다. 필자는 상주에 살면서 대유학자이면서 겸허하고 정직하며 가난하게 사신 모범 관리로 살다가신 큰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당시는 몰랐다. 이제 뒤늦게라도 알고 우복 선생님의 자료를 수집하여 글을 쓰니 감개 무량하였다. 필자보다 먼저 이곳을 다녀가신 분들의 멋진 글을 공부하고 인용 복사하여 우복 정경세 선생님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과거의 선생님의 업적들을 되새겨 보기로 합니다. 다행히 요새 건강을 위해 이안천 걷기를 하는데 바로 이곳이 이안천의 가장 중요한 관광지이니 정말로 흥분되고 기쁘다. 상주를 통과하는 이안천은 주변에 명승지가 많은데 이곳 우산리가 제일 좋은 역사적관광지다. 이근방 구마이 마을부터 이곳을 거쳐 염소목마을-청암서원-쾌재정을 지나는 이안천주변은 우리나라 제1의 명승지다. 그러나 상주 사람들은 이 좋은 명승지를 잘 모른다. 상주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고장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홍보하는 것도 애향애국이 아닐런지!!!!  따라서 모든면 에서 부족한 필자가 감히 우복대감에 관한글과 종택에 대해 답사하고 그에 관한 글을 씁니다
 
2일전에는 충북의 금수산을 다녀와서 2일간의 이안천 걷기를 빼먹었다. 다소 아쉽다. 오늘도 피곤 하지만 상주자택을 출발하여 이곳 외서면 우산리 우복종택에 도착했다. 현재 우리나라에 우복 정선생님 만큼 큰벼슬하고 유학자,시인, 교육자인 분이 있을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우복대감은 조선 선조 시절 임진왜라과 정유재란을 모두 겪고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며 왜적과 싸우며 가족까지 살해당한 분이 있을까? 역사상 그리 많지는 않다고 본다. 한양도성에서 왜적을 격파할 명령을 받은 이일장군은 상주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혼자 살려고 군복을 벗고 단기로 달아났고 상주목사 김해라는 인간 상주 목사는 겁을먹고 기적을 숨기고 화북으로 도망갔지만 우복대감 가족들은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지휘를 한 분이다. 전쟁 전후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검소하게 살아 마지막 사망할때는 너무 가난하여 친구 조우인의 도움을 받은분 아닌가?  높은 관직에 있을때 친척이 취직을 부탁해도 그사람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들어주지 않은 만고의 청백리다.  사망 당시는 가난했지만 사후에 영조임금이 후손에게 사패지를 주어 후손이 다행히 밥이라도 먹고 사람 행세하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우복 정선생님 본인은 지나치게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아서 지금과 같은 좋은 집에 살고 있지 않았다. 자금의 우복 종택은 우복 사후 후손들이 재건하고 증축한 건물이다. 현재도 국가에서 보수하고 있다. 종택 옆의 계정이 아직 초가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안다. 2아들도 본인보다 먼저 사망한 사실은 기가 막히다. 3부자의 묘소는 공검면 부곡리에 있다. 필자는 이분들의 이런 사연을 조금 알고 오늘 우복 종택을 두루 구경하고 촬영하며 당시를 상상했다. 계정과 대산루, 도존당, 우산서원 등을 구경하고 곳곳에 존재하는 알류미늄 표지판의 시를 감상하기도 했다. 이근방 명승지 10경에서 작성한 한시를 상주시와 상주문화원에서 곳곳에 설치하였다. 우산서원까지 둘러보고 산으로 오르니 처음에는 좋은 산길이 이어진다. 대형상수도 물통도 존재한다. 선생님과 후손들이 올라갔을 듯한 뒷산 300m봉과 400m봉을 올라가보았다. 평소는 송이 입찰지역이라 못가지만 이젠 버섯 채취 철이 지난 가을이라 버섯에 관한 점은 문제 없으리라 생각하고 산을 올랐다. 초입에는 길이 있더니 산 중턱에는 족적도 길도 없어 막산을 타고 능선을 행해 자주 쉬며 올랐다. 낮은 야산이고 올 초봄에 한번 다녀간 곳이라 반가운 능선이었다. 우측 350m 봉의 일부 오름길인 약간의 미답지를 두고 안부에서 좌쪽인 남서쪽 높은곳 400m봉으로 이동했다. 안부에서 우측 동북편 350m 봉은 초봄에 다녀갔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도제이 가는 도로와 독점농장이 조망되고 축사가 보인다. 은척 남산 - 성주봉 아래 임도가 산중턱을 지난다. 장관이다. 미답지를 두고 서쪽으로 오르니 기묘한 명품 바위 투성이다. 멀리서 볼때는 소나무 푸른 숲이었으나 직접 와보니 명품바위가 많다. 400m봉을 낑낑대며 오르니 저 멀리 높은 봉우리들이 첩첩산중이다. 체력상 더 이상 못간다. 400m 무명봉에서 조망하다가 하산을 한다. 송이버섯 입찰 지역이라 누가 흰줄을 매어놔서 따라 한참 내려갔다. 그러나 한참 가니 흰색 실선은 없어지고 바위지대 낭떠러지다. 이런낭패!!! 이쪽 저쪽 살피다가 낙엽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갔다. 족적이 없으니 낙엽을 줄줄 타고 하산한다. 돌도있고 나무가지가 있어 찔리고 넘어지고 얼굴 강타당하고 또 다시 미끄러져 넘어지고 개고생이다. 동네에서는 뭐소리를 듣고 개들이 마을에서 짖는데 도리어 반갑다.
 
흰선친 쪽으로 내려가니 다소 높은 바위지대다. 조심조심 낙엽치우고 요리조리 내려가는데 겁이난다. 미끄러지면 다친다. 엉덩일 땅에 대고 나무를 잡고 조금씩 내려가니 감질나고 다리가 후덜거린다. 낙엽에 누워서 하늘을 보고 한참 쉬기도 했다. 죽지사자 생지옥 지대를 내려가니 족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개짖는 소리도 가까워지고 한참 이리저리 창의적으로 내려가니 묘지와 밭이다. 염소 우리에 개가 염소를 보호하느라고 계속 짖고 그곳에 사는 독가촌 주민 부부가 초라한 나를 보면서  왜 그기서 내려오냐고 책망한다. 힘이들어 하산 사실을 공손하게 이야기하니 험한 곳을 어찌 왔느냐고 도리어 위로한다. 남자분과 10분간 이런 저런 이야기하고 길 안내를 받아 이안천과 도로로 이동했다. 내가 내려온 곳의 뒤를 돌아보니 저곳을 어찌 내려왔나 싶다. 무모한 짖이다. 이것은 등산이 아니다. 죽는 연습이었다. 옆에 좋은 길이 있는데 하필 위험지대로 내려왔다. 재수 더럽게 없었다. 어제 꿈을 땜했다. 잠시후 주민과 헤어지고 이안천과 버스 다니는 구마이-우서길에 도착하여 정처없이 이안천 옆 도로 길을 걷는다. 이안천 걷기는 요새 내가 총길이 종주 52.6km 도보 걷기 타이틀을 걸고 다니는길이니 버스를 타면 안된다. 금방 버스가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왜 안타는가 싶어 궁금해지는 모양이다. 아름다운 이안천을 지나는데 너무행복하다. 걸어도 걸어도 다리가 안 아프다. 걷다가 감나무에 걸린 작은 감이 꽃모양이다. 아름다운 감을 2개 따먹고 점심을 대체한다. 우서길을 한참걸어 빙 돌아 가니 무진암이다. 우서초등 캠핑장 근방이다. 이안천 옆 멋진집을 누가 절로 만든 같다. 그곳부터 이안천을 따라 가는데 80세 할머니가 유모차를 끌고 처녀와 간다. 무조건 인사하니 반갑기 받는다. 자꾸 대화해보니 우복종가 종부이다. 교양이 철철 넘친다. 우복선생님과 후손들을 아는대로 애기하니 종부가 공감한다. 서로 반가워하면서 사진 촬영을 하자니 거부한다. 일하다가 오던 이모습이 전국에 보이면 안돤다고 함부로 촬영안한다. 대신 차 한잔 하시고 가라고 한다. 그럭저럭 애기하다가  종택 주차장에 다와서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혹시 상주시내서 만나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 주차장 이용도 하고 명승지를 두루 구경 잘했으니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81세 분이라 누님 같기도 한 인자한 분과 마지막 손들고 인사했다. 종손은 출타중이라 보지 못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차를 회수하여 우산공원으로 내려와 돌장승에서 촬영하고 큰마을인 우산리 병암고택과 마을회관, 우산보건지소 등을 촬영하고 20분후 우산재 터널을 통과하고 상주자택에 오후 5시에 도착했다. 점심은 쫄쯜 굶은상태다. 등산과 여행을 마감했다. 등산 끝. 

                                                     본인 소유 폰의 오룩스 맵에 이동된 오늘의 이동지도
 
* 오늘의 주 답사지 :  우복종택(愚伏宗宅/시도민속자료 제31호)과 대산루(對山樓/시도유형문화재 제156호 )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

네이브 지도의 오늘의 이동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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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부터는 멋지게 작성한 분의 자료를 출처 표시하고 올립니다.
 
* 한국사람 seongho0805의 자료를 복사함.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우복종택 전경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선생님은 상주 율리에서 명종때 태어나 류성룡에게 수학하였고 선조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우복선생은 영남학파의 4세대 대표자로 추앙받았던 분으로 이황의 학문를 계승하고 있다. 우복선생은 17세기 김장생의 주기론적 예학에 맞서는 영남학파의 사상적 지주였다. 이곳에 우복 종택이 지어진 것은 선생이 38세 때 한때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조그만 정자와 살림집을 짓고 7년 간 거처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이후 우복동천으로 불렸다. 이후 영조 때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사패지로 하사함으로서 5대손인 정주원鄭胄源때부터 대대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복종택은 영조 때 땅을 하사 받으며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따라서 집은 영조 연간인 1750년 전후에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세상을 밝게... : 네이버 블로그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의견 교환을 하고 싶습니다. 서로친구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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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38세 때 이 고장에 들어와 남은 여생을 지낸 곳으로, 우복동천이라고도 한다. 선생이 서선조와 인조때 성실하게 활동한 것을 치하하여 영조가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 하사함으로서 5대손인 정주원 때부터 대대로 살게 되었다.튼 ㅁ자로 배치된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가묘가 남아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부엌·안방·윗방·대청·상방으로 구성되었고, 사랑채는 一자형 구조로 사랑방·대청·건넌방이 배열되어 있다. 집 몸채의 바닥이 마당보다 상당히 높게 자리잡고 있어 특이하다.

상주 우복 종택 안채 조선시대 목조, 5량(몸채), 3량(익사), 팔작지붕 141.7㎡ 진주정씨종중
사랑채 조선시대 목조, 5량, 팔작지붕 81.4㎡
아래채 조선시대 목조, 3량, 맞배지붕 83.2㎡
대문채 1991년 목조, 3량, 맞배지붕 81.3㎡
사당 조선시대 목조, 5량, 맞배지붕 72.2㎡
별묘 조선시대 목조, 3량, 맞배지붕 46.4㎡
계정 조선시대 목조, 3량가, 초가지붕 13.9㎡
대산루 조선시대 목조, 5량가, 팔작지붕 111.6㎡
631.7㎡  

* 국가 민속 문화재 지정사유 : 우복(禹伏) 정경세(1563~1633) 선생은 1602년 대산루를 짓고 1603년 별서 기능을 가진 계정을 지었으며 그의 고손자인 주원(1563~1633)은 영조가 하사한 사패지에 종택을 지었다.이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에 자리하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이 튼 口자형으로 배치된, 종택으로써 갖추어야 할 건축적 요소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남 지방의 반가이다. 종택보다 이전에 건립된 계정과 대산루는 별서 기능에서 종택의 별당과 또는 접빈공간으로 기능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대산루 T자형 평면구성은 영남지방 반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정조가 하사한 시문판을 소장하고 있고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시대 제례문화가 현재까지 전승되는 등 역사적·학술적·민속적·건축적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보존할 가치가 있다.
 

                                                사랑채
 
* 우복종택은 넓은 산등성이에 동향으로 지어졌다. 집 배치는 튼 ㅁ자 형태로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곁채와 함께 ㄷ자 형으로 구성되었고 그 앞쪽에 전면 5칸 측면 1칸의 사랑채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사당이 곁채 동쪽에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종택좌측에 종택에서 조금 떨어져 우복의 6대손인 입재立齋 정정로의 불천위 가묘가 있다. 우복종택은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솟을대문을 들어자마자 높은 단 위에 서있는 사랑채를 마주하게 된다. 사랑채는 전면 5칸 측면 한칸으로 안채로의 출입은 별도의 중문을 두지 않고 사랑채를 돌아 안채로 들어가도록 구성하였다. 사랑방에서 바로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고 사랑마루에서 바로 안채를 들어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점에서 내외 구분이 경상도의 다른 집과 달리 심하지 않다.[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사랑채툇마루(단이 있음)

 
사랑채에서 흥미있는 부분은 대청으로 올라가는 부분이다. 사랑채는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계자난간이 없는 한 칸이 바로 대청으로 올라가는 입구인데 다른 부분보다 조금 낮게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오르내리기 편하게 하려고 낮춘 것 같은데 조금은 어설퍼 보인다. 조금 더 낮게했다면 더 편리했을 것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사랑채 당호는 산수헌山水軒 이다. 사랑채가 워낙 높은 곳에 자리 잡다보니 솟을대문이  바로 앞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대청에서 보면 앞산이 바로 발치에 있는 것처럼 다가 온다. 그야말로 산수헌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풍광이다.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안채 전경

 

안채는 ㄱ자형을 뒤집어 놓은 형태로 전면 4칸 측면 5칸 건물로 몸체는 겹집구조이다. 이미 상주 양진당에서 소개였듯이 이 지역은 겹집구조의 잔재가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우복종택 역시 그런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 중 몸체부분은 좌측 한칸이 안방으로, 다음 두 칸이 대청, 나머지 한 칸이 건넌방으로 꾸며져 있다. 안채에서 바깥 쪽으로 나온 날개채는 앞쪽 두 칸이 부엌이고 뒤쪽 세 칸이 안방과 상방으로 꾸며져 있다.곁채는 뒤로부터 두 칸이 광이고, 가운데 부엌이 있으며, 앞쪽 두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곁채를 붙여 적극적으로 ㄷ자 형으로 만들지 않을 것은 다른 튼 ㅁ자형태의 집처럼 전면 행랑채에 광을 만들 수 없어 곁채에 광을 들이면서 광으로 출입을 원할케하고자 함으로 보인다.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대청

                                                                             대청

 

 

 

* 계정(청간정)

작은 초가집은 계정溪亭이라 불리는 건물이고 뒤에 있는 누각건물이 대산루對山樓다. 계정은 대청 한 칸, 방 한 칸으로 꾸미고 지붕은 초가로 올린 단출하면서도 검박한 건물이다. 우복선생이 이 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건물로서 평소 생활을 위해 꾸민 건믈로 보이는데 우복의 평소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닌가 한다. 계정 뒤쪽에 있는 대산루는 우복종택보다 주목받아온 건물이다. 우복종택이 소개된 경우는 거의 없어도 대산루는 많이 소개되었다. 대산루는 입재 정종로가 1700년 대 후반에 지어 대산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산루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이층 건물이다. 누정건물로 2층은 흔하지만 2층에 온돌방을 들인 건물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대산루 전경

대산루는 평면이 ㅜ자 형태이다. 좌측으로 뻗은 날개는 1층이고 누마루 부분은 2층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1층 부분은 강학공간으로 쓰였고 2층은 주인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층은 측면 두칸, 정면 5칸 건물로 좌측 두 칸은 대청으로 중간 두 칸은 전면에 툇마루를 둔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우측 한 칸은 부엌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꾸며졌다.대산루 누마루 부분은 정면 두 칸, 측면 다섯 칸 건물로 1층은 부엌과 창고로 구성되었고 2층은 누마루 온돌방, 고방, 두 칸의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뒤편 고방과 책방은 모두 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구성된 모습으로 보아 누마루 후면은 모두 주인 전용공간으로 보인다.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대산루 계단

 

2층에 온돌을 들인 경우 그 온돌 하부는 모두 흙으로 채워 쌓았다. 온돌 특성상 다른 방을 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층에 온돌을 들이는 경우 지상에서 5자 정도 흙을 채운 후 그 위에 아궁이와 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구들장을 올린 후 흙을 덮어 온돌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아궁이가 일반집처럼 낮은 곳에 있지 않고 사람 눈 높이 정도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도 그런 방식으로 되어있다.누마루 1층은 모두 돌로 마감하였는데 이것은 온돌을 들인 곳이 흙이 쌓이기 때문이다. 온돌이 들인 곳을 흙으로 마감해도 되지만 그렇게 될 경우 들이치는 비 등으로 벽이 손상될 수 있어 돌로 마감하였다. 온돌을 들이지 않은 1층 창고도 같은 이유로 모두 돌로 마감하였다. 그렇다보니 옆에서 보면 일반 한옥에서 볼 수 없는 중후함을 느낄 수 있다.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대산루 마루의 구멍

 

이곳에서 재미있는 구성 중 하나는 누마루에 뚫어져 있는 구멍이다. 누마루 중간에 구멍이 뚫러져 있는데 구멍형태가 마치 옛날 변기인 매화틀과 같게 생겨서 혹자는 용변을 보는 구멍이 아니었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속단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옛날에는 대부분 집안에서 요강을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곳에서 용변을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쉽게 용도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비슷한 구멍이 있는 다른 집에서는 청소를 위한 구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 견해가 맞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사람들에게 논란 대상이 되는 것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나무로 계단을 만들 수도 있는데 왜 돌로 만들었는가하는 점이다. 김봉렬은 돌계단을 대산루 계획의 핵심이라 정의하면서 누각부분에 차별성을 두기 위한 무언의 통제소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은 과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현재 계단 양측면과 후면을 돌을 쌓아 마감하고 계단 하부를 흙으로 메꾼 것으로 보인다. 계단 뒷부분 두 기둥 기초를 큰 댓돌로 앉힌 것을 보면 처음부터 돌로 마감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이 김봉렬의 말대로 차별성을 두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돌로 놓을 경우 바닥이 차서 특히 노인들에게는 매우 좋지 않다. 이런 문제점까지 감수하면서 돌로 계단을 놓은 것은 다른 뜻이 있을 것 같다.[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대산루에서 본 풍광

 

 

어쨌든 지금과 같은 돌구조에 나무로 계단을 만든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나무로 계단을 짜맞추어 설치하는 것도 쉽지 않고 설사 나무 계단을 설치했다해도 나무가 쉽게 썩게 된다. 따라서 장인의 입장에서 계단재료에 대한 선택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산루對山樓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산을 마주대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나무가 크게 웃자라 좌측으로 조금 산이 보일 뿐이지만 처음이 누정을 지었을 때는 앞에 산이 아주 잘 보였을 것이다. 대산루의 이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앞에 나무를 조금 잘라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을 것 같다.

[출처] 상주 우복종택 |작성자 한국사람

 

* 위 자료는 한국사람 seongho0805 님의 글을 복사해서 올렸습니다. 내용이 너무 좋아 출처기재하고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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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필자가 오늘 우복 종택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을 올립니다. 

 

우산종택 대형주차장

 

우산터널지나 우산보건지소 3거리에서 조금가면 천하대장군 천하여장군이 있는 우산공원이 있고 조금가다가 개천따라 가거나 큰다리 건너서 우산 종택을 오르면 넓은 주차장이 등장 - 도로에서 300m 정도입니다.

 

우산 종택 대문

대문 우측에 우복 종택 설명 안내도 존재하여 읽어봅니다. 

댓돌도 양반은 충계라고 합니다.

종손이 살고 있는 안채입니다. 어머님도 계십니다.

안채의 정원

 

종택에서 도로쪽을 향해 봅니다.

 

 

역광으로 여러번 안내판을 여러번 촬영합니다만 그게그거네요. 20경 절영 위치 안내도

이안천 걷기에 관계되는 이안천이 지나갑니다.

초가집이 과거 계정인가 봅니다. 뒷편에 대산루가 존재합니다.

이 초가는 청간정이라고도 합니다.

1번 한시 계정-우곡 잡영 20절중1

 

 대산루와 계정의 상세설명 안내판

아래 대산루는 계정을 더욱 확장시킨 것입니다. 입재선생님이 증축한것입니다.

  •  영남의 강학소로 사용된 대산루 

 

대산루 아래 통풍지대

돌표지석에는 우복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하였네요.
 
이곳 까지는 우복 종택의 여러 장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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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 사진은 우산서원 건물입니다. 대원군때 철폐되었다가 다시 재건한 서원
쇠사슬 문이 잠겨 있으나 우측으로 들어가봅니다.

우산서원 여러건물입니다.  우산서원 현판은 감상용 선생과 허목 선생이 쓴 글씨입니다.  처음에는 우복서원 이라고 함

우산서원 여러건물

서원에 부속된 여러 건물이 있는데 좋은 문화재 같습니다. 소방시설 수도시설 등이 있고 종손이 풀을 없에면서 종택과 서원을 관리하네요.
 
이상은 종택과 서원 건물 사진입니다. 설명이 모자라 한국사람 님의 카페에서 복사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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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사진-


* 다음사진은 우복선생님이나 후손이 자주 오르내린 종택 뒤산 400m 무명봉을 등산하며 이안천 걷기도 했습니다. 등산 사진과 이안천 걷는 사진 올립니다.
 

우산서원  답사 후 뒷산으로  오릅니다. 처음에는 산으로 가는 길이 좋습니다.

대형상수도물통 존재

처음에는  등산길이  있다가 없어서 족적따라 오릅니다

길이 없어지고 맙니다. 족적따라 창의적으로 등산요함

산돼지 숙소

기묘한 소나무

명품바위들이 많아집니다.

나무사이로 조망되는 대전리

멧돼지 호텔을 또 봅니다.

명품바위자주 등장

급 오르막

 
 

조망ㅡ성주봉과  독점농장

                                             400봉에서 독점 오리 농장을 조망하나 사진이 별로입니다.

바위 아래 마을 독점 농장과 남산 성주봉을 가로지르는 임도 광경 사진

400m봉 무명봉 도착

400봉 ㅡ 흰줄따라 하산

여성바위

개고생  하산

 

여기서 부터 흰줄이 없어지고 바위지대 위험지대라 개고생 낙엽타고 찔리고 까지고 그러나 개가 마을에서 짖어 도움-멀고먼 고행길-족적도 없는 막산하산하느라 개고생-사고나기 좋을 만한곳으로 잘못 내려옴

개고생하며 하산중 

간신히 도착

새들 무들 마을 도착 -- 염소사육하는 독가촌 주민과 대화 -고생하신 같은데 그러지 말라고 말하네요.

다음번에 다시 올라갈 곳 

징검다리 건너 농로와 구마이 가는 군도에 도착 -5km 이안천 도보로 도로따라 

이안천은 말 없이 흐름

이안천 양 강변 멋진 바위벽

도로 진입 순간

우산교 도착

이안천 강변 우사 

따지 않은 돌감이 꽃처럼 - 3개 섭취

경치 좋은곳에 어김없이 좋은 시가 있는 시비터 등장

새들 무들 승강장-구마이서 우산간 사이 도로

상우교와 무진암

 

무진암은 개인 별장인데 사찰로 만듬

우산 종택가는 방천길

이안천 종택근방 방천길

 우산 캠핑장 앞-과거 우산초등
 

방천길의 멋진 시 비 알류미늄판

이안천 변에 여러곳에 시판 존재

우복종택 종부를 만나서 애기했지만 사진 촬영은 사절 -뒷모습만 촬영-종손은 출타중
 

주차장에 원점 회귀 - 애마회수

종택 앞 멋진 이안천

우산공원

우산장승 내력 설명판

병암 고택

우산보건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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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시 모음 


한시를 상주 문화원에서 새웠느데 10경중 6경곳 만 보고 촬영했습니다.

우산리 일대 우북 종택 근방  한시판을 따로 모아 올렸습니다. 빠진것은 촬영대로 수시로 추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