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설공찬전에 관한 특별강의

문장대 2023. 6. 8. 15:38

* 강의명 : 설공찬전의 발견 경위와 작품의 이모저모

* 강의자 :  서경대학교  이규복 명예교수

* 강의 날짜 : 2023년 6월7일(수) 

* 강의 장소 : 경북 상주시 상주 문화원

* 강의 대상 :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참가자는 상주시민과 문경의 인천 채씨 문중 후손 150명 정도

 

* 강의 내용과 과정

이날 상주 문화원 4층 회의실은 주로 금요 사람방을 개최하는 곳인데 특별 강의로 제1교시는 중림문화센터 대표 박원경 박사가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이라는 주제로 강의 하셨다. 박원경 대표는 조상의 이름인 중림을 따서 서울 정동에 중림문화센터를 운영하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퇴직 교원들이 연구활동을 하시는데 이곳 운영이사로 이복규 서경대 교수님도 여러회원들과 연구활동을 하신다고 한다, 좌우간 제1교시는 박원경 선생님이 강의를 하셨고 제2교시 100분간은 이복규 교수님이 박원경 교수와 공저인 "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상세하게 설명하셨다. 책도 무료로 주셔서 많은 참석자들이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후 100분 수업 후반에는 최고 오래된 설공찬전의 발견 경위와 책내용, 그리고 당시 조정에서 4개월이나 갑론을박한 사실은 특이하다. 

 

- 설공찬전의 발견

전북의 남원에서는 춘향전의 배경이란 점을 활용하여 춘향테마파크를 조성하였고 남원춘향제를 개최하여 활기찬 남원을 만들고 있다. 전남 장성에서는 홍길동 테마파크를 만들어 관광객 유치를 하고 있다. 상주도 설공찬전의 창작지가 상주이므로 설공찬전 테마파크를 조성가능하다. 순창에는 설공찬전의 배경지라서 관련 테마관이 새워졌다. 설공찬전은 최초의 필화 소설(금서)이므로 국민의 흥미를 끌기 유리합니다. 이런 보배 같은 설공찬전은 1997년에 고소설 <설공찬전>한글본이 이복규 교수님에 의해 발견되었다. 훈민정음 언해본 상주본이 상주에서 발견된과 같이 대단한 발견이다. 따라서 상주에 설공찬전 테마관의 조성이 절실하다. 다행히 인천 채씨 문중에서 테마관 설립을 추진중이라니 기대가 된다. 채수 선생님은 채신보 함창현감의  아들이다. 아버지 채신보 선생의 자는 자휴(子休), 호는 만계(灣溪)로, 1438년(세종 20)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함창현감(咸昌縣監)을 거쳐 1458년(세조 4)부터 1465년(세조 11년)까지 7년간을 음성현감으로 재직했습니다. 그 후 경산현감(慶山縣監)·평해군수(平海郡守)를 거쳐 1482년(성종 13)에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를 지냈고, 1484년(성종 15) 64세부터는 처가가 있던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물언덕에 소산정사(梳山精舍)를 짓고 산수와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냈습니다. 채수선생님은 아버지의 부임지인 함창과 가까운 오늘날 공검면의 살구나무 마을로 장가를 들어 만년에 처가지인 상주 이안에 쾌재정을 짖고 그곳에서 설공찬전을 작성했다. 아마도 1508년 중종3년에 작성된 서적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지만 대중화 되지 못하는 시절 전국민이 읽기 싶도록 한글로 작성된 윤회설과 화북설의 소설인데 염라대왕, 연좌, 지옥,극락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읽기 쉬워 멋진 소설로 인기를 누렸으나 요망한 책자로 간주되어 전국으로 퍼진 책자를 거두어 불살랐다. 중종 6년에 채수 선생님은 탄핵되었다. 소설이 만들어 지고 3년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소설의 원문이 발견됨. 당시 본 소설을 두고 4개월간 신하들과 중종은 토론을 벌였고 갑논을박했다. 이는 역사에 유례가 없는 사례고 구운몽, 금오신화, 홍길동전, 박지원의 소설 어느것도 왕조실록에 거론된적이 없었으니 설공찬전은 당시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서 채수에 대한 관심이 재고되어 초기소설사를  새롭게 기술할 수 있다. 작품의 배경지인 순창과 창작지인 상주에서 활발하게 채수 선생님의 테마관이 각각설립되고 조성될 예정이라 기대가 된다. 금오신화의 배경은 경주 남산이고 구운몽의 배경은 남해인데 설공찬전의 배경이 순창이고 창작지가 상주라는 것은 괄목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작품으로 창작지와 배경지가 뚜렷한 것은 설공찬전라는 점은 특이하다.

 

설공찬전 한글본은 성주이씨 묵재공파 소장(충북괴산) 묵재일기책의 간지사이에 필사된것을 이복규 교수는 발견했다. 그 발견 동기는 국사편찬위원회 초서 연수과정을 수료(1995년 2월-1년과정)한 덕분이라고 한다. 성주이씨 묵재일기를 넘기든 중 왕시전, 왕시봉전 등의 소설제목이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 공찬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금서로 불태워진 설공찬전이 묵재일기에서 등장하였다, 이로서 1997년 4월 한남대에서 열린 한국고소설학회에 발표하고 중앙일보에 특집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486년만에 등장한 설공찬전은 극적으로 이세상에 나타났다. 고소설 전공자인 이복규 교수의 눈에 띄어 최초의 금서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 문장대 이종하는 성주를 본관이라서 더 없이 반갑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한문소설로서는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이고 한글소설로서는 홍길동전이라고 한국국문학사에서는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각종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어 왔다. 그러나 이보다 100년 앞선 채수의 설공찬전이 한글로 작성된 소설이다.  설공찬전은 당시 괴서로 민중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금서로 취급되어 조선의 책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홍길동전은 당시 역적으로 처형된 허균이 지은 책이지만 명맥을 유지하여 우리나라 공식 한글소설로 인정받은게 아이러니하다. 채수 선생님은 죄를 받았지만 목숨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허균은 역적으로 거열형을 받았는데도 홈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인정 받은 것은 금서가 아니었던 같다. 조선시대의 재미있는 소설의 저자는 거의 무명인라는 점은 아쉽고 아쉽다. 그만큼 문학의 발달에 저해되었던 같다. 그러나 묵재일기 등과 같이 일기체의 유적이 각문종에서 발견된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박지원의 열하일기등 여러 창작집과 이순신의 난중일기 서애선생님의 징비록 등의 유적은 아무런 문제 없이 전해져 오늘날 국문학과 역사적 사실에 기여한 점은 이채롭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유교국가에서 불교와 관련된 윤회설이 설명된 불교에 관한 글이라 금서가 되었고 다른 여러 서책들은 유교적 이거나 세상 살아가는 일기체라서 전승되었다고 생각해본다. 다음부터는 설공찬전에 대한 특징과 가치 등을 연구하고 강의한 이복규 서경대 명예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그분이 주장하는 설공찬전에 대한 특징 한글원본 발견경위, 상주가 창작지가 된 이유 등의 설명을 기술하고자한다, 이복규 교수님의 강의를 요약 정리해본 셈이다.

 


상주시문화원은 6월 7일 상주문화원 회의실에서 '한글로 읽힌 최초 소설 『설공찬전』의 특징과 가치'에 대한 특강을 가졌다
본 행사는 경북선비아카데미의 일환으로 '설공찬전' 한글본을 최초 발견한 이복규 서강대학교 명예교수가 특강을 했다. 이 자리에는 상주시민 100여 명과 문경의 인천채씨 문중 50여명이 참석하여 선조에 대한 정신과 최초 한글 소설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설공찬전'은 한글로 읽힌 최초의 소설로 창작지가 상주이다. 이복규 교수의 설공찬전 발굴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논란이 되었던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고 작자 채수에 대한 관심도 제고되고 있으며, 순창에서는 2021년 6월 설공찬전 관련 '설공찬전테마관'이 건립되어 운영 중이고, 이 작품의 창작지인 상주시 이안면 괘재정은 2011년 경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설공찬전은 애써 죽음 문제를 회피하려는 현대인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매개물로 작용하고 있다. 인천채씨 상주문경 종친들은 ‘난재채수기념관’ 건립을 위해 부지를 매입해 추진중에 있다. 1997년 이복규 교수의 최고 한글소설 발견으로 대한민국 사학계 눈길을 끌어오고 있다

이날 이복규 교수는 "상주에서 창작된 설공찬전이 지닌 특징과 가치를 적극활용해 상주에 세우려고 계획중인 난재채수기념관에 다양한 콘텐츠를 채워 놓아 상설 전시 및 특별전시로 운영해 문화컨텐츠가 활성화되길 기원한다" 고 말했다

출처 : 문희저널(http://www.mhj.kr)

 

* 설공찬전의 배경인 순창군 금과면의 설공찬전 테마관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면 소재지인 매우리와 내동리 그리고 뒤로 금과면의 진산 아미산(峨媚山, 515.1m)을 봅니다.아미산 너머는 북쪽 방향으로 순창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고추장 민속마을이 있어 순창읍과 금과면 두 지역이 모두 진산으로 여기는 산인데요, 산의 형상은 금과면에서 봐야 산 이름 그대로 미인의 눈썹 또는 초승달을 닮은 중국 산동성 아미산과 닮은 풍광을 볼 수 있어 예로부터 순창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시인 묵객들의 칭송이 자자한 산입니다. 오늘 아미산이 품고 있는 금과면에서 순창 설씨가 등장한 소설 하나를 소개하려는데요, 바로 금과면이 순창 설씨가 대거 집성촌을 이뤄 사는 본향이기 때문에 아미산부터 둘러봤습니다.

순창 금과면 실내체육관 앞에는 지난해 개관한 <설공찬전 테마관>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소설이 바로 <설공찬전 薛公瓚傳>인데요, 순창 설씨 실존 인물과 금과면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조선 초기 중종 때 문신 채수(蔡壽, 1449~1515)가 쓴 괴담 소설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국문입니다. 채수의 여러 글 중 언문으로 쓴 것이 없어 최초에는 한문으로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묵재 이문건(齋 李文楗, 1494~1567)이 1535년부터 1567년까지 쓴 묵재일기를 1997년 서경대학교에서 이복규 교수가 탈초(초서로 쓴 한자를 정자로 바꾸는 작업) 중 언문으로 쓴 4천여 자 분량의 <설공찬전>이 제3책 (1545~1546년 일기)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최초의 한글소설로 그동안 알고 있었던 허균(1569~1618)의 <홍길동전>보다 100여 년 앞선 최초의 한글소설이라고 하는데요, 자세한 내용은 <설공찬전 테마관>을 둘러보면서 알아봅니다.   설공찬전 테마관에 들어서면 <설공찬전의 태실 금과면>이라는 제목과 함께 지도가 있습니다. 지도에는 설공찬전 소설 속에 나온 실존 인물들의 묘와 생가터, 관련 유적 등이 소개되었는데요, 그 외 금과면 가볼 만한 문화유적지도 함께 표시했습니다. 설공찬전 테마관을 둘러보고 그중 두세 곳을 가보려는데요, 지도 한 장 들고 떠나는 <설공찬전> 동네 한 바퀴가 되겠습니다.

설공찬전 테마관은 순창군에서 운영하며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운영시간은 같습니다. 전시물은 <설공찬전>을 최초로 발견한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그동안 연구한 자료 150여 점을 2020년 6월 순창군에 기증하면서 조성하게 되었는데요, 금과면 주민쉼터를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해 지난해 후반 개관했습니다. 중종실록 14권(1511년) 중종 6년 9월 2일 기유 1번째 기사 내용입니다. 사헌부가 채수를 탄핵하니 답하다.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 채수가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이 윤회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중외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로 옮기거나 언어로 번역하며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에서 마땅히 행이하여 거두어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실록을 풀어보면 채수의 <설공찬전>은 한문으로 쓰였고 최소 1511년 이전부터 널리 언문으로 번역돼 대중이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국문학사적 관점에서도 대단한 발견이라고 하는데요,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 1465~1470>에 이어 두 번째로 알려진 신광한(1484~1555)의 기재기이<企齋記異, 1553> 사이의 100년을 메꿔준 한문소설에다 그동안 학계에서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이 장편에다 완벽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 그전에 어떠한 형태로든 국문으로 쓴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설공찬전>이 발견되면서 두 개의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린 것입니다. 

중종실록 14권 (1511년) 중종 6년 9월 5일 임자 7번째 기사 내용입니다. <설공찬전>을 불살랐다. 숨기고 내어놓지 않는 자는 요서 은장률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 즉, 중종이 사헌부에 명해 채수의<설공찬전> 원본은 물론 언문으로 번역된 모든 <설공찬전>을 압수해 불태웠고 책을 내놓으라고 포고를 했음에도 숨기고 내놓지 않다 적발되면 요서은장률(妖書隱藏律, 불온서적을 몰래 숨긴 죄)로 벌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요서은장이란 현대적 표현으로 '금지도서'이며 주로 5, 6공시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반하는 서적, 북한의 서적, 역사적인 내용을 왜곡한 서적, 북한의 선전물을 담은 서적 등을 금서로 지정해 읽으며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했는데요, 책 자체를 불사르지는 않았습니다. 

기록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금서는 1411년 좌의정 박은이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운관(書雲觀)과 민간이 소장한 참위서(讖緯書,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기록한 책 )와 음양서(陰陽書, 천문, 역수, 복서, 지상 등을 상고하여 길흉을 점치는 방법을 기록한 책)를 수색·압수해 불태우도록 명령한 것이 최초인데요, 이후에도 많은 왕들이 성리학의 정통 사상을 확립하기 위해 혹세무민하며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각종 참위서와 음양서는 금서로 지정해 압수했지만, 소설이 금서가 되고 불태워진 것은 <설공찬전>이 최초인 듯합니다.그럼 <설공찬전>을 지은 채수는 어떻게 해서 순창 금과면을 배경으로 했고 실존 인물 순창설씨를 주인공 및 배역으로 삼았을까요?

그것은 <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 9월 20일 기사에 나오는데요, <설공찬전>을 불사른 뒤 15일 후 기록으로 " 설공찬은 채수의족인이니, 채수가 반드시 믿고 미혹되어 저술하였을 것입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즉, 채수의 누이가 효령대군의 손자 평성군 이위와 혼인해 낳은 딸이 있는데, 그 딸이 순창 설씨 설충란과 결혼했기에 채수는설충란의 외삼촌이 됩니다. 1749년에 간행된 순창 설씨 족보입니다. 채수의 외조카 설충란을 비롯해 설충란의 아우 설충수가 나오고 설충란 밑으로 3남 3녀가 있고 설충수 밑으로 아들 하나가 있는데요, 소설 <설공찬전>에서 설충란과설충수는 실존 인물이고 그 아들과 딸들은 소설 속에 가상 인물로 등장하지만, 직접 실명을 거론하기보다 가명을 쓴 실존 인물로 보입니다.  

순창 설씨는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6촌장의 한사람인 설호진을 시조로 박혁거세가 신라 초대왕이 된 뒤 설(薛)씨를 성으로 하사받고 본관을 경주로 했는데요, 36세손 설자승이 1124년 이자겸의 난을 피해 처가인 순창으로 낙향해 구림면율복리에 살면서 순창 설씨의 입향조가 되었습니다. 이후 고려시대 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해 모두 중앙 정계의 요직을 차지했고 조선시대 들어서는 설위가 금과면 마곡마을에서 동전마을로 이거해 1419년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성에 오르고 설위의 조카 설계조는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설위의 아들 설갑인, 손자 설충수, 증손자 설공성 등 순창 설씨 족보에 나오는 사람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는 등 금과면을 중심으로 하는 순창 설씨는 전북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럼 500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엑소시스트 소설 <설공찬전>으로 들어가 볼까요? 
 
 ‘조선시대에 현대판 엑소시스트 소설을 쓰다’ ‘임금도 주전충같은 반역자이면 지옥에 간다’ 묵재 이문건(齋 李文楗, 1494~1567)이 41세 때인 1535년 11월부터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567년 2월까지 약 33년간 쓴 묵재일기입니다. 이문건이 을사사화에 연루돼 20년 넘게 귀양살이를 했던 관계로 현재 전해지는 것은 17년 8개월분인 10권인데요, 성주 이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기를 1996년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탈초(초서로 쓴 한자를 정자로 바꾸는 작업) 작업을 하던 중 언문으로 쓴 4천여 자 분량의 <설공찬전>이 제3책 (1545~1546년 일기)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일기도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지만, 설공찬전 역시 일기의 뒷부분이 전해지지 않았는데요, 전해진 내용을 요약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순창 설씨들의집성촌에 설충란이라는 선비가 살았다. 그의 아들 설공찬은 공부하기를 즐기고 글쓰기를 잘하였으나 스물도 안 돼 병들어 죽었다. 누나였던 딸 역시 시집간 뒤 며칠 만에 병들어 죽었다. 둘의 원통한 원혼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맴돌았다. 설충란 동생의 이름은 설충수, 그 아들은 공침었는데,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병을 얻어 아주 오래되어서야 기운을 차렸으나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달랐다. 공찬의 누이가 먼저 공침의 몸에 빙의한 것이다. 빙의된 공침은 시름시름 앓았다. 이에 설충수는 무당을 불러 아들의 몸에서 누나 귀신을 내쫓았다. 누나 귀신은 공침의 몸에서 나가면서 " 나는 계집이라 약해서 물러나지만, 내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 오겠다" 라고 말하며 나갔다. 

이후 공침의 몸에 공찬이 들어가 빙의했고 설충수가 다시 무당을 불러 쫓아내려 하자 " 그런 행위는 결국 공침을 다치게 하고 나는 하늘가로 다니기에 다치지 않는다" 라고 조롱했고 자신을 쫓아내는 방법을 알려준 뒤 숙부가 그대로 따라 하자 " 과연 내 술수에 빠졌구나" 라며 또 조롱했다."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나오는 설공찬 환혼전 공찬이 빙의한 공침은 나날이 야위어갔고 정상으로 돌아올 때는 울면서 " 공찬의 혼령이 자꾸 내게 와서 죽을 것 같다" 라며 애원하자 설충수는 다시 무당을 불러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공침의 몸에 빙의한 공찬은 크게 화를 내며 설공침이 팔다리를 비틀고 눈을 뒤집고 혀를 파서 베어내 코 위에 올라가 귀 뒤를 오가게 하고 옆에서 병간호하던 종도 반쯤 죽었다 깨어날 정도로 시달리자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당을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원상태로 되돌렸다. 

하루는 설충수가 오랜만에 아들 공침과 겸상을 하는데, 난데없어 왼손으로 밥을 떠먹는 걸 보고 " 공침아 왜 왼손으로 먹느냐? 라고 했더니 공침 왈 " 저승에서는 다 이렇게 왼손으로 밥을 먹어요" 라고 대답했다. 이후 공찬은 공침의 입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 저승은 40리 떨어진 바닷가에 있는 단월국이며 왕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이승에서 어진 재상은 죽어서도 재상이고 이승에서 여편네였어도 약간의 글을 잘 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을 맡아 잘 지내고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면 저승에서 좋은 벼슬을 받고 비록 임금이었다 하더라도 주전층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있더라"  

또한 " 명나라 황제 성화제가 자신의 신하 수명을 1년 정도 연장해 달라고 염라대왕에게 요청했는데, 1달 이상은 곤란하다고 하자 계속 보챘다. 그러자 화난 염라대왕이 " 아무리 천자라고 해도 사람 살리고 죽이고 하는 건 내 권한인데 어디서 고유 권한을 침해하는가" 라며 꾸짖고 당장 그 신하를 잡아오라고 하자 놀란 성화제가 몸소 염라대왕을 찾아갔는데 염라대왕이 황제에게 " 수명을 늘려달라고 부탁한 신하를 잡아다 그 손을 삶아라" 라고 명령하면서 소설이 끝납니다. 물론 그 뒤로 계속 이어졌겠지만, 아쉽게도 나머지 부분은 멸실돼 확인할 수 없는데요, 지금까지 내용만 봐도 당시 시대상으로는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내용이었고 특히 " 임금이 반역자라면 지옥에 간다" 라는 구절이 당시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했기에 중종의 역린을 건드려 서둘러 금서로 정하고 수색 압수해 불질러 버린 것입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탈초 작업하다 발견한 보물같은 한글소설’ ‘묵재일기 전체에 대한 문화재지정 서둘러야’ 설공찬전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97년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에 의해서입니다. 총 10권 17년 8개월에 이르는 방대한 묵재 일기가 초서로 쓰여 정자로 바꾸는 탈초작업 중 3권의 낱장 속면에서 언문으로 기록된 <설공찬전>을 발견한 것인데요, 홍길동전보다 무려 100년이나 앞선 한글소설이 기록되었고, 우리나라 무속 신앙 중 하나로 사주를 보아 단명할 것으로 예상되는 아이를 부처나 수양부모, 무당, 귀신 등에게 양자로 보내 액막이를 하고 수명을 늘리는 <아이팔기>가 최초로 나타난 문헌에다 당대 조선에서 성행했던 무속신앙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일기라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조선시대 에 작성된 일기 중 국보(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와 보물(미암일기 등)로 지정된 모두 28건이고 9건은 시도유형문화재(이재난고 등)로 지정되었다는데요, 묵재 일기 또한 보물급 일기로 문화재 지정은 묵재 일기 중 손자 이수봉이 16세가 될 때까지 양육 과정을 일기로 쓴 양아록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 외에는 더 이상 문화재 지정은 없어 아쉬운 대목입니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설위(공찬의 증조부), 설총란(공찬의 아버지), 설충수(공찬의 숙부), 완산이씨(공찬의 어머니) 등 묘소 사진과 각종 연구 자료가 설공찬전 테마관에 전시되었습니다. 이복규 교수는 묵재일기에서 설공찬전을 발견한 뒤 설공찬전의 배경 금과면을 샅샅이 뒤져 관련된 사람들의 묘는 물론 관련 유적지까지 모두 찾아냈는데요, 지도에 표시해놨지만, 1990년대 후반이라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대여서 자세히 찾아갈 수 있는 주소 등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군데 겨우겨우 찾아봤는데요, 소설 속 살구나무 정자인 삼외당과 설충수의 집터 그리고 설위가 살았던 동전 마을을 둘러보겠습니다.

 " 설공찬의 혼령이 설공침의 몸에 실린 상태에서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자주 갔다" 라는 내용에서 삼외당은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설충수의 집도 삼외당 뒤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삼외당은 선조 대 문경 현감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의병장에 막하에서 큰 전과를 올린 순창 출신 홍함(1549~1593)이 지은 정자라고 합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자신의 호를 딴 정자를 짓고 여러 문인들과 교유했다는데요, 소설이 1511년 이전에 지어졌으니 그 이전부터 조그만 정자는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삼외당 아래로 하천이 흘렀고 조망이 좋았을 마을 입구 바위 위여서 더더욱 조그만 정자는 있었을 것으로 보이네요.

순창군 금과면 매우 마을회관 뒤가 설충수의 집터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주소로는 금과면 매우리 174-1인데요, 설충수의 집터 앞에 있다는 마암은 찾지 못했습니다. 금과에서 큰 인물이 나면 반드시 마암(磨巖) 바위가 한 바퀴 회전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설공찬의 증조부 설위가 태어날 때도 바위가 돌았다는 전설이 후손들에게 내려오기 때문인데요, 현재 설충수 생가 터에는 사람이 살고 있기에 집 뒤로 추정되는 마음은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생가 옆 신성한 바위 마음을 대신 사진으로 보는데요, 훗날 <설공찬전 테마관>에서 관련 유적지에 대한 자세한 주소 안내와 함께 관광안내문도 만들고 스탬프 투어 계획도 마련한다고 하니 빨리 그날이 왔으면 하네요. 

마지막으로 들른 금과면 매우리 동전 마을입니다. 조선시대 대사성을 지낸 설위가 살던 마을로 2010년 발간한 <금과향지>에 따르면 금과면에 살고 있는 순창 설씨는 84가구로 그중 동전리 동전 마을에 15가구, 고례리 고례마을에10가구, 내동리내동마을에 15가구가 살고 있으며 최초로 입향한 구림면 근처인 쌍치면양신리 양산 마을에도 집성촌이 있다고 합니다. 2015년 기준 42,646명이 순창 설씨라고 하니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것에 비하면 그리 흔치 않은 성씨인데요, 그래도 종친회가 27개에 이르는 등 순창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설공찬전 외에도 아미산 동쪽 순창읍 가남리 설씨부인 (신말주의 부인) 권선문(1482년 작성, 보물, 국립전주박물관)과 금과면 동전마을에 있는 전라북도 기념물 설진영 서실 등 순창 설씨 관련 유적지가 있으니 설공찬 테마관과 함께 둘러보면 유익한 순창 설씨 관련 유적지 여행이 되겠습니다.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출처 : 전북중앙(http://www.jjn.co.kr)

* 설공찬전의 줄거리

- 순창 금과면 아미산 밑에 사는 설충란에게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결혼하여 바로죽고 아들 설공찬도 장기 가기전에 사망한다.

-  공찬이 죽은 후 설충란은 신주를 모시고 3년간 제사지내고 무덤 곁에 신주를 묻는다.

- 설충란의 동생 충수의 집에 공찬누나의 귀신이 나타나 사촌동생 공침의 몸에 들어가 병들게 한다. 

- 설충수가 주술사 김석산을 불러 퇴마를 시도하자 남동생 공찬을 데려오겠다고 하며 물러간다.

- 공찬의 혼령이 와서 공침의 모메 들어와 수시로 왕래한다.

- 충수가 아들의 병을 낫게 하려고 김석산을 불러다 조치를 취하자 공찬이 공침을 극도로 괴롭혀 충수가 그러지 않겠다고 하자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켜 준다.

- 설공찬이 동생과 윤자신을 불러 저승소식을 전한다 : 저승은 바닷가에 있으며 순창에서 40리이고 나라이름은 단월국이며 저승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 저승 심판의 양상은 책을 살펴서 명이 다하지 않은 영혼은 그대로 두고 명이 다한 영혼은 연좌보냄. 이승에서 잘 살았으면 저승에서도 잘 지내고 악하게 살았으면 지옥으로 떨어짐. 염라왕이 있는 궁궐은 장대하고 위엄이 있음.  지상과 염라국의 관계는 죽은사람의 영혼을 처리하는 것은 염라왕의 고유권한이라 지상의 황제도 개입못함.

 

* 설공찬전에 대한 각계의 반향

- 우리나라 소설을 국역한 첫사례는 중국소설이 아니라 우리나라 설공찬전이다-외국어대 민관동 교수)

- 최초의 국문소설은 한문소설을 발판으로 정음으로 번역 성립이며 그사례가 설공찬전이다(단국대 황패강 교수)

- 설공찬전의 실물이 추가되어 우리 초기소설의 실체를 가질 수 있게 된 사례이며 국문소설의 존재가 홍길동전 이전에 존재 했음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게 된점이 중요하다(서울대 김종철  교수)

- 중앙일보 1997년 4월 28일 1면과 3면에 특집기사로 소개를 시작으로 모든 일간 신문에서 설공찬전 발견사실 보도.

- 중고등학교 현장에서 최초의 한글소설이 어느것이냐를 문제점으로 토론

-  순창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에서 관심이 크게 조성 - 순창의 설공찬전 테마관, 상주에서도 채수 기넘관 건립 노력중

- 소설의 개작 : 이서영 작가는 " 다시쓰는 설공찬전" 김재석 작가의 "다시쓰는 설공찬이" 책이 다시 출판된 점이다. 

- 웹툰이나 영화, 뮤지컬 등 여러장르에 걸쳐서 설공찬전이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 설공찬전의 특징

- 철학사상면에서 특징과 가치입니다.  인간은 죽으면 흑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귀신이 되어 존속합니다. 이는 유교 사대부들의 인식과는 다릅니다. 채수 선생님은 무신론자이지만 젊은 시절 귀신을 체험하여 유신론자로 살았고 이를 문학작품을 통하여 형상화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귀신관, 내세관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죽은사람이 가는곳을 설공찬전에서는 저승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유교 사대부들의 인식과는 다른 점이다.저승에서 악인을 지옥, 명이 다한 영혼을 연좌라는 특별 영역을 상정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은 연속적이기도하고 불연속적인 관계를 지닌다고 채수는 보여준다. 이승에서 어진 재상은 저승에서도 어진 재상으로 지내고 이승에서 남의 원한을 사지않고 존귀하게 지낸사람은 저승에서도 존귀하게 지낸다. 이승에서 사납게 지내고 공덕을 쌓은 것이 없으면 저승에서 그 자손까지 사납게 살게된다는 서술에서 이승과 저승간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불연속성은 여성이라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소임을 맡아 잘 지내며 이승에서 임금께 충간을 하다가 비명횡사해도 저승에선 좋은 벼슬을 하고 이승에서 임금을 했더라도 주전충처럼 반역하여 와위에 오르면 지옥행이다.  적선을 많이 한사람은 이승에서 천하게 살았어도 저승에서는 존귀하게 지내고 이승에서 존귀하게 살면서도 악행을 쌓으면 저승에서 불행하게 지낸다는 설명이다. 조선시대 내내  민간에서 이러한 설이 내내 전해지고 있었다.

 

- 정치사상 특징과 가치입니다. 군신관계를 부모 자식간의 관계처럼 되었다면 임금은 신하를 내쳐서는 안되며 끝까지 보좌하여 어진 군왕이 도어야 한다는 점이다. 맹자의 역성혁명의 이론과는 구별되며 나름대로 근거를 가진 주장이다. 채수는 실제로 그런생각을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였던 것은 발전적이다. 허균이 서얼들의 차별을 없애는 애기를 홍길동전에서 보여주었는데 이보다 100년전에 채수는 여성 해방의 필요성을 제기헸다. 한국 폐미니즘(여성주의)를 주장한 것이 역사에서 주목할 사례이다.

 

- 설공찬전은 국문학적 특징과 가치를 5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1740년 김시습의 금오신화의 뒤를 이어 2번째로 쓰여진 소설로  그다음에 나오는 1531년의 오륜전전, 1553년 기재기이 사이의 교량력할을 하는 작품이다.

 

둘째 한글로 읽힌 넓은 의미의 최초 국문소설이다. 원작은 한문이었으나 인기를 끌어 한글로 번역되어 각지에서 읽힘으로서 한글 창제 이래 처음으로 다수의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은 사례이다. 소설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상하계층 모두 관심이 있는 내용이다. 금오신화는 대중성은 없었다.  예를들어 성경이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독일어로 변역되어 대중화되고 종교개혁이 성공했던 것과 비교된다. 한글번역본인 설공찬전이 일반 민중에게 인기가 얻게된 동기입니다. 너무 인기가 좋아  조정의 탄압을 받아 이소설이 소각되어 지고 말았다. 마치 중국 진나라 진시황때 분서갱유를 방불하게 한다. 그리고 오륜전전이 등장하여 한글소설의 명맥을 잇는다.

 

셋째 소설의 효시이다.

설씨의 인척인 전주최씨, 풍양조씨, 문화류씨, 씨족원류 등을 분류한 결과 주요 인물인 설공찬과 설공침, 설공찬의 누이가 모두 실존인물일 가능성이 매우크다. 따라서 실화에 근거한 작품이며 첫사례다.

 

넷째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의 효시를 보면 금오신화를 계승한 작품이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한 고소설이 절대적으로 적은 현실을 고려하면 소중하다. 채수는 실화를 바탕으로 작품을 지은것이 가장 중요하고 휼륭하다. 중국을 배경으로 작품을 구성하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필화에 대비한 책략이다.

 

다섯째 : 상층 사대부(집권층)의 소설이다. 전국을 방랑하다 지은 김시습의 금오신화보다도 국정 고위 관료출신인 채수가 소설을 쓴것은 지식사화의 충격적인 일이다. 이소설은 당대에 파란을 일으켰고 후대 허균, 김만중, 권력층이 소설을 작성허여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한 선례를 마련했다.

 

여섯째 : 소설의 사회적 영향력을 입증한 작품이다. 국문소설의 출현에 불씨역할을 했고 여성의 사회참여, 소설이 민중에 지대한 영향을 확인 시킨 작품이다. 남북전쟁때 링컨대통령이 엉클 톰스 캐빈의 작자인 스토우 부인을 만나 치하한 사실은 이소설이 북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설공찬전도 화복의 윤회설이라는 민중이 현혹한 작품으로 당시 사회의 영향력에 지대했다는 점이다. 이외에 기타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 필화, 금서로 지정된 소설이다>

<귀신이 등장해 하고싶은 말을 하는소설-공찬의 혼령이 남의 몸에 실려 하고싶은 말을 함>

< 저승과 지옥이 등장하는소설>

< 최초의 폐미니즘 소설-여성도 글을 알면 관직 임용>

<작품의 후반부가 없는점-몰래 베끼다가 두려워 중단>

< 금서인데 일기책의 뒷장에 몰래 적혀 있다가 500년만에 우연히 발견>

 

* 에필로그

상주에서 창작된 설공찬전이 지은 특징과 가치를 적극 활용해  상주에서 건립하려고 계획중인 난재 채수기념관에 다양한  콘텐츠를 채워 놓아 상설및 특별전시로 운영해 국내외 관객을 유치했으면 합니다. 단순한 흥미와 오락용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차별화가 가능하다. 교육적 가치와 흥미를 겸비한 기관으로 소문나게 함으로써 상주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 하는 데 효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요즘의 화두가 웰빙과 웰 다잉입니다. 잘살고 잘 가야 합니다. 이둘은 별개가 아닙니다. 웰다잉을 잘알고 준비해야 웰빙도 가능합니다. 그런면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와 영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설공찬전은 죽음 문제를 회피하려는 현대인들에게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매개물로 작용합니다. 이외 여러 특징과 가치를 오늘의 관심사와 접목해 다른 지역처럼 문화 콘텐츠가 활성화하는 계기가 이루어 졌으면 합니다. 

 

* 참고문헌 

1. 이복규. 한글로 읽힌 최초소설 설공찬전의 이해(지식과 교양, 2018)

2. 이복규. 묵재일기 소재 국문본소설 연구(박이정, 2018)

3. 상주문화원 특별강의 팜플렛(한글로 읽힌 최초 소설 설공찬전의 특징과 가치)-이복규 명예교수  설공찬전 강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