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소재 노수신 선생님(조선 선조시대 영의정)

문장대 2023. 3. 31. 21:49

소재 선생님은 1515(중종10)년 출생하여 1590(선조23)년으로 76세에 사망

 

 

                 상주시청에 소장된 소재 노수신 영정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 학자.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 이재(伊齋) · 암실(暗室) · 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상주(尙州)인데, 서울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활인서(活人署)별제(別提)노홍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예조 참판이자화(李自華)의 딸이다. 풍저창(豊儲倉) 수(守)노후(盧珝)의 손자이고, 탄수(灘叟)이연경(李延慶)의 문인(門人)이며 그 사위이다. 정부 요직에 골고루 근무하신 후 마지막 벼슬은 영의정임. 소재 노수신 선생님 묘역은 경북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봉산서원 30m 위에 존재합니다. 상주가 고향인 노수신 선생님에 대하여 글은 주로 소재 선생님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자료를 복사하여 올렸습니다. 자료 출처는 글을 올린 즉시 표시했습니다. 먼저 소재 노수신 선생님의 조상들이 살았던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 유적지를 중심으로 여러 자료와 사진을 올렸습니다. 소재 선생님은 16세기 중종ㆍ선조 대에 활동한 대학자로 학문과 정치에서 특출한 위상을 지닌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식년문과(초시ㆍ복시ㆍ전시)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7년 선조 즉위 이후에는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올라 국정을 주도했다. 또 심성론과 수양론을 자신의 심학으로 이뤄낸 양명학자이자 최고의 시인으로 자신의 독자적 학문세계를 일궈 조선의 사상계를 풍성하게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소재집, 시강록, 숙흥야매잠 등이 전해진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일생을 학문과 후학을 위해 매진했으며 숙종때 시호(文簡)가 내리면서 불천위가 돼 현재 상주 봉산서원에 제향 됐다. 국가공신 혹은 덕망이 높은 인물을 나라에서 정해 제사를 지낼수 있도록 허락한 사람의 신위다.조선의 대학자이자 양명학자 ‘소재 노수신’ 선생님에 관한 글임.(경상매일 신문 노재현 기자님 글 일부 복사)

 

* 소재 선생님의 부모님과 조상분 들이 살았던 곳을 다음과 같이 지도에 표시했습니다. 확대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장소는 경북 상주시 화서면 사산길 2-12의 옥연사 유적지를 표시했습니다. 이곳에는 사당, 신도비, 종가집이 있고, 소재 선생님 묘소는  종가집과 정재수 기념관 못가서 도로 우측 봉산지 앞에 있습니다. 봉산동 승강장 표시 우측 50미터에 큰 시비석있고 기와집이 여러채있는 봉산서원 옆입니다. 

당진영덕 고속도로에서 화서 IC로 나와 25번 국도타고 보은쪽으로 500m 가다가 정재수 효도 기념관 입구에서 달천리 지나고 나면 사산리가 나옵니다. 사산리 마을회관에 주차하고 조금 걸어면 신도비와 옥연사 사당이 나옵니다. 물론 이근방에 종가집이 있습니다. 묘지는 정재수효도기념관 못가서 봉산저수지 못 옆 낚시터 옆인데 차다니는 도로에서 봉산동 마을 방향길 10 m안에 있네요. 봉산서원 주소는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584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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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번 국도에서 효자 정재수 기념관의 이정표를 보고 달천리-사산리 지방도로 들어갑니다. 조금가면 육묘공장 등장합니다. 봉산서원과 묘소, 종가, 옥연사 사당 입구 사진입니다.

25번 국도에서 보은에서 상주사이 화서면 화령고등 200m 근방  효자 정재수 기념관 가는 길인 달천리로 들어가서 육묘공장지나 한참가면  봉산동 입구가 적힌 승강장 근방에 봉산저수지가 있다.  바로 앞에 봉산서원이 존재한다. 봉산서원을 살펴보고 담벼락 뒤를 따라 오르면 좌측에 소재 선생님 묘역이다. 화령고등 정문앞으로 가는길은 화동-모서-모동-황간 가는길이므로 그곳 길로 가지말고 태봉산 아래 신호등 4거리서 200m 보은쪽으로 가서 정재수 효도 기념관 방향인 달천리-사산리로 가다가 봉산서원과 봉산지를 발견해야합니다. 도로 우측 10m 옆입니다. 기와집이 여러채 있고 도로에서 보면 저수지 둑이 보입니다. 위 지도 참고

 

 당진 영덕 고속도로에서 화서 톨게이트 나와 25번 국도에서 보은 방향으로 500m 가다가 좌측으로 가는 길에 아래와 같은 이정표가 보인다.  이길은 육묘공장-달천리-사산리- 소곡리 -중눌리-세중리로 이어지는 지방동인데 상주 마을시내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이다. 

 

위 간판 2번째 옥연사는 사찰이 아니고 소재 선생님 조부와 부친인 노후-노홍 사당입니다. 이곳에는 신도비가 2 존재합니다. 소재 선생님 묘지가 있는 근방의 유적지인 이곳 25번 도로에서 효자 정재수기념관 방향으로 들어가 달천리 지나  봉산동 마을회관 입구의 봉산서원은 3.2km입니다. 마을 버스가 다니는 길이고요.

 

달천리로 들어가서 육묘공장 거쳐서 정재수 기념관방향으로 3km 가면 봉산동 승강장이 나타나고 봉산저수지 둑이 보이고 우측에 기와집이 많은 봉산서원이다. 봉산서원 앞에 주차하고 큰 시비석을 보고 서원답사하고 나와서 뒤로 오르면 소재 선생님 묘역이다.

 

지방도에서 10미터 들어가면 소재 선생님 시비석이 웅장하게 존재하고 옆은 봉산서원이다. 묘역은 봉산서원을 기준으로 하면 찾기쉽다. 그것도 모르고 옥연사부터 먼저가서 고생함. 옥연사 가기전에 이곳부터 답사요. 도로옆이라 찾기도 좋아요.

 

 

 

봉산서원 앞에는 봉산지 낚시터가 존재하고 도로 우측 10미터 제방이 보이고  승강장이 있는 봉산동 입구이다.

 

 

도로에서 담벼락을 보고 찍은 사진

 

 

도로옆 봉산서원과 바로뒤 소재 노수신 묘지를 답사하고 400m 가니  유명한 효자 정재수 기념관 등장. 효자 정재수군은 아버지와 옥천 청산면의 큰 집으로 설쉬로 가다가 갈티재에서 술취한 아버지를 껴안고 얼어죽은 효성에 감복한 사례로 폐교된 사산초등학교에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단장한 효도기념관. 효도 기념관을 이곳 저곳 구경하고 사산리 노씨 종가와  옥연사로 갑니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사산2리 소재 종가집으로 고고

 

소곡리-중눌리로 가는 3거리에 사산 2리(사래실) 마을비석이 존재하는곳 주차하고 10m거리에 종가집 등장

 

종가집 솟을대문 옆에 옥연사 문패-들어가니 종부가 사시는 종가집이 조용하다.

 

 사산2리 마을비석 앞 종가집을 나와 좌측으로 돌아가면 신도비 등장

 

 

아마도 소재 선생님이 건재할때 신도비가 16세기 설립된 같음-이산해가 글을 짖고 한석봉이 글씨를 씀.

 

 

글씨가 작고 한문으로 기록됨

 

 

정부나 자치단체서 기념관을 새로 지었으나 지금은 문이 잠기고 빈건물 --아쉽다.

 

 

옥연사 마당의 우물

 

종가집과 옥연사를 둘러보고 묘소를 찾으로 뒤산으로 올라 이곳 저곳 다니다가 고생만함. 마을로 내려와 사래실 사산2리 마을회관앞 주민에게 문의하니 봉산서원을 찾아가면 그뒤가 소재묘역이라고 알려주네요.

1km 내려가 차를 회수하여 사산보건소, 정재수 기념관지나 봉산지 저수지를 찾고 봉산서원 발견

 

종가집을 들려 구경하고 뒷편의 옥연사를 답사한 후 무너진  담장을 지나 대나무 밭으로 오른다.

왕대밭에 왕대난다더니 대나무가 굵다.

 

사산2리 마을 뒤산을 이동한다. 이유는 소재 선생님 묘지를  발견하기 위해 

 

산을 이리자리 헤매다가 고생만 하다가 마을로 내려옴-주민에게 문의하여 묘지가 이곳에서 3km아래의 봉산서원 옆에 있다는 정보를 얻고  종가집 방향으로 차를 회수하려 내려간다.

 

사산2리 사래실 마을은 광산노씨 집성촌 마을이다. 이마을로 입향한 상촌 선생님이 선조이다.

 

다시 종가집과 옥연사가 있는 사산2리 마을 입구 도착. 옥연사는 절이 아니고 광산노씨 사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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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2일(일)  소재 노수신 묘역과 소재 조부, 부친 신도비가 있는 옥연사, 종가집을 답사했다. 묘지는 옥연사 뒤편 대나무 밭으로 올라가 거의 2km 의 야산을 샅샅히 살피며 이리저리 이동해서 천택산 아래까지 갔으나 끝내 발견못하고 고생만 했다. 결국 마을에 내려와 사산2리 사래실 마을 회관에서 만난 주민들에게 문의하니 이구 동성으로  오던 곳으로 뒤내려가 정재수 효도 기념관 500m 아래 도로옆 봉산지 앞 봉산서원 좌측에 존재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상주 인물이신데 아무런 표시가 없는게 아쉽다. 상주시에서 이정표나 묘소 위치를 도로에 표시 했으면 고맙겠다. 컴퓨터에 검색으로 글에 실린 묘지 위치의 설명으로 다녀서 온통 고생만 했다. 글에서 나타난 위치와  실제 위치는 다르다. 봉산서원 옆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둡니다. 사진으로 설명합니다. 

 

 

 

* 아래 사진은 19년동안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 주민들을 많이 깨우치고 주민과 화합하여 진도에서 추앙받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유배생활을 제일 오래하여 임금이 잊을 정도의 세월을 고생하고 진도에 거주했습니다. 아래 영정은 진도군에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고향인 상주에서 보다 더 많이 사신 곳입니다. 

                                                19년간 유배되었던 진도군에 소장된 노소재 영정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위치한 소재선생님 묘역-봉산서원 바로 좌측 옆에 있는데 바로 앞에는 봉산지 못이 있고 큰 시비석이 있습니다. 소재 선생님 묘역은 이정표가 없어서 아쉽지만 봉산서원이 도로옆에 있고 주차하고 조금 오르면 문인석과 비석이 있는 제법 큰 묘지가 있습니다. 

 

                                         

* 상주시의 정승들(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역사 도시 상주는 조선시대에 6명의 정승이 상주가 고향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 이름은 김동원, 장순손, 김우항, 김자점, 노수신, 유후조 이다. 필자가 40대에 상주의 유명학자 유시완(유성룡 후손)선생님께서 상주 한문 서당을 개설하여 사서 삼경을 배우도록 배려하셨다. 당시 한문 강사 선생님은 90세 정도의 유학자로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 마평마을에 거주하시는 오야 장병규선생님이셨다. 수업이 끝나고 잠시 좌담을 할때 오야 선생님은 상주는 6정승이 태어난 곳이라 자주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분들의 출생지를 답사하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류후조 선생님은 상주가 출생지이고 고향이 확실 하고 다른 분은 성주(장순손)와 낙안(김자점), 청주(김우항)출신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인터넷에서도 검색이 안되는 김동원 선생님은 이순신 전기를 읽을때 당시 병조판서인 김동원의 서녀를  이순신의 첩으로 주어 사위를 맺을려고 했던 줄거리가 생각나서 당시 병조판서가 나중에 정승에 올랐으리라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볼 다름이다. 그러나 소재 노수신 선생님은 부모님이 상주 출신이라 상주가 고향이라고 보아도 될 같다. 소재 선생님도 한양 남부 낙선방(지금의 인사동) 에서 출생하였지만 상촌 선생님 부터 조상 대대 이곳에서 선조들이 사셨다. 부친인 노홍 선생님이 한양에서 잠시 벼슬살이 할 때 출생하였지만 한양이 고향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다.  소재 선생님의 할아버지 노후 선생님, 아버지 노홍이 모두 상주 분이다. 상주 화서면 사산리에 종가집이 있고 할아버지, 아버지 신도비가 증명을 한다. 신도비는 198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노후와 노홍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盧守愼)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각각 영의정과 좌찬성에 증직된 문신들이다.옥연사(玉淵祠: 노수신 사당)에못가서 봉산서원 옆애 있습니다.  정재수 기념관 지나 사산2리 사래실 사산 보건소 근방에 주차하고 조금만 걸으면 종가집과 옥연사 사당이 존재합니다. 신도비 2개가 존재하는데 노후, 노홍 신도비입니다. 1581년(선조 14)경에 세웠다. 원래 이 신도비는 인근 부락 소곡리에 있던 것을 이전하였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분에게 새우거나 2품 벼슬이 아니더라도 임금의 명에 의하여 신도비를 새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후 및 노홍 신도비 [盧珝─盧鴻神道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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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노소재 선생님은 1515(중종10)년 출생하여 1590(선조23)년으로 76세에 사망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2년전이니 그 험한 7년전쟁을 격지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에 임명된 후에는 여러 사건으로 진도, 순천, 충주, 괴산(시안)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고초를 당했다. 노수신(: 1515(중종 10)∼1590(선조 23))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과회()이고, 호는 소재()·이재()·암실()·여봉노인()이며, 시호는 문의()였다가 후에 문간()으로 고쳐졌다. 본관은 광산(광주)이다.  부친 노홍이 서울에 있을때 한양 남부 낙선방(현 인사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조부와 부모가 상주 사람이고 자주 상주에서 생활했고 사망후에도 묘역이 상주에 있으므로 소재 상주분이다. 요새 시골 임산부가 서울가서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그아기가 서울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모님이 상주에 주로살고 모든 생활 기반이 상주이니 소재 선생님은 분명한 상주사람이다. 중종 26년(1531)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년 27세에 이언적에게 나아가 배웠다.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로 전적 수찬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더욱 덧붙여짐으로써 진도에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유배지에서 입버릇이 내가 왜 을사사화에 연루되었으며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 되었나하고 억울하게 중얼거릴때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얼마나 엉터리 죄를 받았는가 짐작이 간다. 19년간 진도에서 유배동안에 이황(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숙흥야매잠()』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즉시 교리에 기용되고, 이어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기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노수신의 철학사상은 명나라 철학자 나흠순을 수용하였다. 나흠순의 리기일물론()과 도심인심체용설()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나흠순의 욕망긍정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황·기대승 등은 나흠순을 선학()으로 규정하고 노수신도 선학의 혐의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노수신 (조선 전기 심성론, 2004., 김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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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후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 : 정교하고 명확함.)해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 : 전하여 외워옴)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 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그는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 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해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해,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해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출처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51761  2013.06.07. 우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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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낯설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소재 노수신과 연관된 진도 이야기를 공유한다. 젊은 시절 19년간이나 유배되었다가 복원되어 이후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양명학파의 거물이자 유배시인이 왜 그리 알려지지 않고 있을까?진도읍에서 북서편으로 한시간도 채 못 달려가면 지산면 안치리에 도달한다. 유배 형식의 하나였던 '위리안치'에 나오는 '안치'가 아닌 나즈막한 고개가 있는 안골에 있는 동네이다보니 보전방파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같은 섬이라도 바다로 노를 젓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었던 적거지중의 오지였던 곳이다. 지금도 동네 주민은 30여명이나 될른 지. 노수신은 순천에서 이배되어 진도에서만 19년의 유배기간을 거친다. 근 20년을 유배지에서 보낸 이는 조선내내 최장수 유배자가 아닐 듯 싶다. 본시 상주 출신의 양반인 그는 젊은 날에 서울에 처를 두고 혼자 유배에 올라 안치에서 현지 부인과의 사이에 3남을 둔다. 하지만 이들 후손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양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준다. 노수신이 안치에서 비참하게 초당에 의탁한 곳을 그는 소재정이라 이름 짓고 이후 호를 소재라고 부르게 된다. 소재는 충주로 잠시 이배되어 가서 드디어 유배생활을 끝내고 선조의 부름을 받아 급속 승진 절차를 밟는다. 좌의정, 우의정에 이어 영의정까지 삼정승 단계를 다 밟은 그를 우리는 아직 기억을 못한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타계한 까닭에 임진왜란에 묻힌 선조시대의 성리학 르네상스의 주인공 마저 역사에서 굵게 다뤄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소재가 남긴 글에 의하면 당시의 진도의 사회상이 나타나있다. 한양에서 천리 보다 먼길을 왔을 그가 겪은 섬 생활은 지독히도 야만적이었던 것이다. 당시 진도 군수는 왜 죄인에게 쌀밥을 주느냐면서 '기장' 으로 배를 채우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왜구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당시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아예 진도 주민 전부를 70여년이나 영암군 시종면등에 이주시켜서 그야말로 진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유인도여야했다. 급갑진과 남도진 벽파진 등 군 수비 세력을 갖춘 다음에야 육지에 나가있던 진도 주민들이 재 입도하여 터전을 새로 잡았으니 제대로 풍속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소재가 접했던 현실은 한심할 정도여서 동네에 힘쓰는 장정이 칼싸움으로 아녀자를 가로채는 등 무법과 무지가 횡행했다한다. 소재는 무려 19년간을 진도에 있으면서 주민들을 하나씩 교화해 갔고 수준높은 학식과 덕망을 섬 주민들에게 베풀었다. 현재 안치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 있는 다목적 회관은 속히 정비되어 소재기념관을 명실공히 유배지에서 학문을 완성한 대학자를 기리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출처] 22년 유배에서 벗어나 삼정승이 된 소재 노수신|작성자 백구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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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忠孝)의 덕목을 이어온 소재 종가(蘇齋宗家)

타지에서의 긴 유배생활에서도 유자의 덕목인 효를 실천했던 소재 노수신 선생의 종가는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화서면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화령’으로 불리던 유서 깊은 고장인데 상주와 광산 노씨의 각별한 인연은 상촌 노숭 선생이 상산 김씨의 딸과 혼인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소재 선생의 7대조인 ‘노상인’이 화령으로 들어와 터를 잡았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화령에서 소재 선생을 비롯한 광주 노씨 경평공파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긴 유배생활에서도 빛나던 노수신의 삶

소재 노수신(1515년-1590년)의 본관은 광주(光州)고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다.

소재 선생은 오름 막과 내림 막이 반복되는 삶을 살았는데 29살 때 대과(大科)에 급제해 3장(三場)의 장원을 모두 차지하는 천재였으며 모두가 선망하는 이조좌랑(吏曹佐)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앞날이 밝게 빛나는 사림의 젊은 인재였다. 그러다 1543년(중종 38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해 파직당해 순천으로 유배됐다가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죄가 더해져 순천에서 진도로 다시 유배돼 20년간의 유배생활이 시작됐다. 소재 선생은 유배생활 중에도 퇴계 이황과 같은 유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학문을 논하는 등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 결과 ‘숙흥야매잠’과 ‘대학장구’ 등과 같은 서적에 해석을 달아 많은 사람들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통해 당시 성리학의 권위자였던 퇴계 이황과 학문적으로 당당히 견주는 인물로 인식됐다. 특히 진도로 유배됐을 당시는 유교적 예에 밝지 못하던 진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조선의 근본인 유교를 잘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까닭에 소재 선생은 상주 출신이지만 20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던 진도에서 더욱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나긴 그의 유배생활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드디어 끝을 맺는다. 선조는 즉위와 동시에 소재 선생을 불러 가장 높은 자리인 영의정까지 제수했다.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붕당을 서로 화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다 1589년(선조 22년)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그 사건의 주인공인 정여립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 당하고 이후 연로한 나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한동안 잊혀 지내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문의(文懿)’란 시호가 내려졌는데 1693년(숙종 19년)에 ‘문간(文簡)’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효의 실천이 남 달랐던 광주 노씨 가문

소재 선생을 대표로 하는 광주 노씨는 충(忠)과 효(孝)를 매우 중요시 하는 가문이다.특히 상촌 선생과 소재 선생의 삶 속에서 효(孝)와 관련된 사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광주 노씨가 상주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상촌 선생은 노모 이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났다.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으로 노모의 진짓상을 직접 가져다 드렸고 93세로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프게 울다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소재 선생의 문집에 전하는 효제부(孝悌賦)를 보면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를 잘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소재 선생은 실제로 퇴청해 집에 와서는 짧은 옷을 입고 부엌에 들어가 몸소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부모님께 바쳤다고 한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도 고기를 낚거나 꿩을 사냥하면 잘 보관해 뒀다가 사람을 통해 화령으로 보내 부모님을 봉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노숭영정과 광산보략

‘노숭영정’은 상주와 인연을 처음으로 맺었던 상촌 선생의 영정인데 이 영정은 1402년(태종 2년) 서울에 보관돼 있다가 1658년(효종 9년)에 11세손인 봉화 현감 노경명에 의해 상주 화령으로 옮겨졌다.이 영정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에도 여기저기 옮겨지는 등 고난이 많았는데도 후손들의 각별한 관심 덕분에 지금까지 잘 보관돼 있다. 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마다 후손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영정을 더 챙김으로써 진정한 효를 실천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견디다 보니 약간의 훼손이 생기기도 했지만 200여 년 전에 모사한 영정은 현재 상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후손들이 조상을 잘 모시기 위해 노력했던 유물이 노숭영정이라면 반대로 후손들이 가문을 잘 단결해 유지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유물은 ‘광산보략’이다. 1581년(선조 14년)에 소재 선생이 대호군 노서부터 자신까지의 계보를 잡은 광주 노씨들의 족보 초본이다. 족보는 본래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의 단결을 위해 자기 집안의 내력을 기록한 것인데 소재 선생은 자신을 비롯한 후손들이 조상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가문이 잘 보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족보를 작성했으리라 짐작된다. 이 유물은 현재 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218호로 지정돼 있다.

                 상촌 노숭선생님 영정(소재 선생님 조상)-상촌선생님이 이곳 상주에서 살기 시작했다.

 

 

△소재 종가를 지키는 사람들

종가는 제사를 받드는 종손을 중심으로 유지된다.소재 선생은 자신의 직계 자손을 종손으로 두지 못하고 그의 동생인 ‘노극신’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종가를 잇도록 했다. 이후 1693년(숙종 19년)에 소재 선생은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아 ‘불천위(不遷位)’로 받들어진다. 소재 종가의 종손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직계 혹은 양자를 통해 500년 종가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노병학’씨 역시 양자로 들어와 젊은 나이에 종손으로 있으면서 지금의 소재 종가를 열심히 이끌어 나가고 있다. 오늘날 소재 종가에서는 소재 선생의 삶을 온전히 되찾고자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15년에는 ‘소재 노수신 선생 학술문화진흥회’에서 상주문화원과 함께 ‘소재 노수신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소재 종가에는 젊은 종손을 비롯해 종손들의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옆에서 보필해 주는 문중의 어른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종가 차원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소재 선생의 삶을 재조명한다면 500년을 이어온 소재 종가의 미래도 더욱 밝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북일보에서 복사한 자료임)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 마을 옥연사 앞의 광산노씨 종가집 - 김천이 고향인13대  종부인 이여사님이 제사를 지내고 여러 후손들을 맞이하는 노소재 종가집 모습.  상주에 유명한 양반집 종가가 있는것이 자랑스럽다. 오늘날은 종손과 종부가 종가를 지키며 후손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아래 사진은 괴산 산막이 마을 끝의  소재 노수신 적소를 올립니다. 이곳의 적소는 아래 마을이 수몰되기전 괴강 옆에 있었는데 댐을 만들고 괴산 수력발전과 댐의 물을 농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댐을  건설할 때 수몰되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 역사의 현장을 보존한 노수신 유적지입니다. 진도에서 19년간 고생하다가 이곳으로 이배되어 2년간 유배생활 중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아 다시 요직에 기용되고 영의정까지 벼슬이 올랐습니다. 기나긴 유배생활 중 마지막 유배를한곳입니다.  괴산을 당시는 시안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은 등산이 도요새 선생님의 티 스토리에서 복사하여 올렸습니다. (아래 2사진 출처- 서울거주하시는 등산인 도요새 이근진 선생님 티 스토리서 복사함)

산막이  마을 끝에 있는 노수신 적소-수월당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 마을수월당
 
 

* 상주가 고향인 필자가 전국의 여러곳을 등산하면서 유명인의 유적지를 많이 보고 답사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상주의 노소재 선생님의 여러 유적과 역사적인 사실을 수합하여  이종하 등산기에 가끔 글을 올립니다.  참고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