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음산 북쪽 등산로는 험하여 폐쇄된 등산로다. 더구나 북장사 경내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주지스님이 북장사 울타리를 철망으로 막아 북장사를 구경하고 노음산을 오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북장리 정자가 있는 사기동 마을에서 개울 다리를 건너 마을을 통과하여 농로겸 임도를 따라 오르면 지도에 나타나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500미터 농로를 오르면 철문이 나타나고 과거 오리농장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검은 루핑집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오르면 임도 끝난 지점이 등장한다. 여기서 좌측으로 급경사를 오르면 헬기장이고 이곳이 노음산 중간 지점이다. 헬기장부터 외길이며 희미한 길이지만 노음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이 등산로로 여러번 헬기장을 거쳐 노음산을 오르내리며 본 명당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누구의 묘였는지 몰랐는데 3번째 하산하며 살펴보니 징사 식산 이선생님묘라고 묘지 표지석이 있어 상주의 유명한 인물인 식산 이만부 묘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식산 선생님의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식산선생님의 묘역이 여기가 있는 줄 몰랐다.
서울에서 낙향하여 중부내륙 고속도로 상주 나들목 앞 외답동의 천운정사에서 생전에 살았던 사실은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곳 북장사 뒷산에 식산 선생님의 묘가 있을 줄 꿈엔들 몰랐다. 천운이다. 그러나 묘지는 엉망이다. 잔듸는 모두 없어지고 마사토 흙만 묘지를 덮고 있으며 그나마 산짐승들의 소행으로 묘지에 큰구멍이 나있어 폐모가 되었다. 그러나 상석이나 묘표지석등은 오랜 시간 풍화 된 시설이고 좌 청룡 우백호 명당이다.
내생각엔 우리나라 대학자중에 최대로 많은 저서를 남겼고 내용이 너무방대하여 윤선도나 송강 정철에 버검가는 대학자라고 생각된다. 상주에 관련된 5명의 정승은 김동원,김우황, 장순손, 김자점, 류후조이며 이들은 상주 출신이거나 이곳에 오래 살던 정치가이다. 이외 채수 선생님, 정경세 선생님, 정기룡 장군 등은 물론 이외의 대단한 분들이 상주를 빛내는 분들이다. 식산 선생님은 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펴낸 분이다. 그분이 당쟁에 휘말리기 싫어 과거를 포기하고 경상도 상주를 낙향지로 택하여 이곳 식산 아래 외답동에서 살다 가신분이다. 동해사 옆의 식산과 백원산은 상주 3악 다음으로 큰산인데 이곳 식산을 자기의 호로 정했다는 사실도 이채롭다.
북장사에는 식산 선생님이 펴낸 글을 찍어내기 위한 목판이 무척 많은데 주지스님이 보관하느라 큰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사실 북장사는 식산 선생님이 아끼고 발전시킨 절이다. 따라서 북장사와 식산선생의 묘역은 상호간 밀접하며 무관하지 않다. 당시 관찰사에 의하여 식산선생님의 묘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1593년까지 상주에 감영이 존재하였으니 맞는 말이다. 북장사에서는 식산 선생님의 묘를 관리할 의무가 있는데 지금 귀찮은 존재로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묘지입구에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고 묘지도 엉망이다. 상주시에서도 이곳에 안내판이라도 만들었으면 한다. 상주시민들은 식산 선생님을 잘 모르지만 지행록과 누항사등 많은 서적을 저술한 선생님의 업적을 안다면 상주 시민들은 긍지를 갖고 북장사와 식산 묘역을 연계하여 답사하면 좋을 같다. 그러나 묘역을 찾기도 힘들고 험하여 1년전 상주시청에 전화를 걸어 식산묘지 안내판을 새워달라고 부탁했으나 아무소식이 없어 오늘 직접 상주시청에 찾아가서 등산로와 등산로 표지의 업무를 담당하는 주무관을 찾아 하소연했다. 담당자님과 상담하니 내일 2021년 5월7일(금) 등산로를 관리하는 직원을 소개하여 답사를 한 후 시설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고맙게 인사하고 귀가길에 상주문화원장 김철수원장님을 찾아가 묘지 안내판 설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더니 호응을 하신다. 관련 자료를 시청에 보내 식산선생님의 묘역에 안내판이라도 설치하는데 적극 힘을 보태겠다고 하신다. 이분은 식산 선생님의 지행록에 관한 글을 쓰신 분이다. 이후 기분좋게 귀가하고 약속대로 1일 후 5월7일 북장사 주차장에서 오전 10시에 등산로 담당 직원 임종인씨를 만났다. 이분과 의기 투합하고 서로 소개하며 인사 한뒤 북장사 우측 철사창틀 옆 표고버섯 재배지 옆으로 올랐다. 조금올라 안부를 지나 대나무 숲 쪽으로 200미터 내려가니 오리농장터의 민가가 등장한다. 빈집인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니 성모마리아 상 앞에 80대 여자분이 계신다. 정중하게 인사하고 대화를 하니 이외로 이만부 선생님의 묘역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이정표 설치를 위해 왔다고 인사하니 반가워했다. 산주인이 있지만 이정표를 설치하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주인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같이 답사하는 임종인 시청직원이 말씀한다. 가격도 이정표 1곳에 100만원 이상이 소요되고 묘지 이정표는 시청 문화관광과 소관이라고 하신다. 등산로는 산림 녹지과의 소관이지 묘지 안내판은 아니라고 한다. 요새는 개인 산주와 사유지 주인들이 이정표 설치를 반가워 하지 않고 그분들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여러사례를 들어 얘기하시는데 수긍이 간다. 이제 식산 묘로 향하며 대화를 해보니 임종인 선생님은 문경 공평의 큰이모 집안 분이시다. 60대 중반이신데 대기업을 정년퇴직하시고 건강을 위하고 봉사를 위해 시청의 등산로 업무에 동참하신다고 한다. 한때 필자처럼 건강이 안좋아서 힘들때 사모님의 권유로 등산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동병상린이다. 이제는 백두대간의 등산로와 시내 여러 산과 중요 등산지의 시설을 점검하고 설치를 시적 하는 일이 참여하신다고 한다. 참으로 멋진 삶과 노후를 보내신다. 몸도 가볍고 산을 쉽게 오르시는데 부럽기만 했다.
10분정도 헉헉대며 식산 묘역에 도착하여 식산선생님에게 예를 표하고 그분의 업적을 임선생님에게 아는대로 소개했다. 묘지를 보고 우리는 한숨을 쉰다. 여러가지 등산관한 애기를 하고 우리는 하산한다. 다시 오리농장으로 내려와 이번에는 반대편 사기동쪽 철문으로 내려갔다. 북장리 사기동 정자에서 오르는 길을 알리기 위하고 이정표 새울 장소를 답사했다. 역시 산주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힘들 같다. 요새 누가 자기산을 지나도록 산주인들이 이정표를 새우는 허럭을 할까? 더구나 버섯 등 임산물이 산에 많고 산지를 다소 훼손하며 자기 산의 한곳에 이정표를 새우는 허락을 할 수 있단가! 그러나 임종인 선생님은 담당 직원에게 최대한 일이 되도록 노력은 하신다고 한다. 이제는 이정표와 안내판 설치가 반신반의다. 이정표가 설치되는 확률은 50%이다. 어제 밤새도록 꿈을꾸며 희망하던 식산선생님 이정표-안내판 설치가 꿈으로만 만족할 것인가! 철문에서 뒤돌아와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출신이시며 현재 여기사시는 독가촌 주민 84세 여자분에게 다시 인사하고 북장사 뒤 안부를 지나 북장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순수하게 자연인으로 사시는 80대 할머니가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이분은 다소 부서진 성모마리아상을 보며 기도하며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신다. 식수는 좋다하고 풍부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기좋고 물좋은 곳이다. 나도 이곳에서 살고싶다.
인물 탐구 ▶ 식산 이만부 선생님
* 서론
조선 중기 숙종때(1664년-1732년) 서울에서 출생한 식산 선생은 당쟁에 휘말리는 조부와 부친의 어려움을 목격하고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부친을 따라 평안도, 함경도에서 살다가 경상도 상주땅을 택하여 한평생 살다가신 학자이다. 정철, 윤선도, 이이, 이퇴계 등의 유명한 학자들에 버금가는 분이 식산 이만부 선생님이라고 생각된다. 상주 태생이 아니면서 상주를 사랑하고 많은 책을 저술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살아가신 선생님의 흔적을 소개하고자한다. 상주에 살면서 평소 궁금했던 사실은 이곳에는 역사의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학창시절, 청년시절, 직장시절에 역사를 무척 좋아했으며 퇴직후 등산과 상주의 역사적 유적지를 답사하며 노후를 지내고 있다. 그러다가 상주에도 유명한 역사의 인물이 없을까 싶어 궁금해 하던 중 많은 저서와 학문 연구, 유명인사와 교류하시던 식산 이만부 선생님이 사셨던 상주 노곡(외답동) 천운정사와 상주의 명산 식산(503)을 답사했다. 평소 말로만 듣던 이만부 선생님에 대하여 조금씩 점점 공부하다가 오늘은 6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영면하고 계시는 북장사 뒤 오리농원에서 오르는 묘역을 답사했다. 따라서 이만부 선생님의 출생, 생애, 저술 및 학문분야, 거주지, 묘역을 차례대로 기술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만부 선생을 전 국민에게 보길도의 유명관광지 윤고산의 처소처럼 만들기 위한 시초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만부의 묘역은 이정표 하나없고 멋진 명당지인데도 풀한포기 안 자라 무너진 상태고 명 산소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는것이다. 나의 조상은 아니지만 묘지에서 절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동안 찾고 싶고 보고싶은 묘지를 기적처럼 찾아서 참배하며 감격했습니다. 묘지가 너무 허술하여 안타깝습니다. 연안이씨 문중이나 상주시청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충북 진천의 정철 묘역가서도 눈물 안흘렸는데 너무 묘지가 허술해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 출생
이만부 선생님은 1664년 12월 22일(현종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서, 호는 식산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아마도 상주의 5대 명산인 동해사 뒷산이 식산이라고 하는데서 비롯한 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집안은 그의 가까운 친척만하더라도 대과 급제자와 그외 급제자가 다수다. 숙종때 좌 참찬의 이관징이 조부이며 참판 이옥의 아들이다. 부친은 당쟁의 희생으로 선천, 정주, 가산, 안령, 회령, 갑산, 곡성으로 12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때 아버지의 유배지를 전전하며 따라다니다가 1689년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부친과 귀환했다. 남인의 명문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지봉 이수광의 증손녀이다. 따라서 이수광의 실학사상을 계승했다. 태워날때부터 총명했으며 누가 보다라도 큰 인물이 될 것을 확신했으나 당시 당쟁의 피페한 모습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25세에 아버지에게 도학을 배우겠다고 하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너무 안타까워 신하들의 권유로 벼슬을 내려주었으나 끝내 포기하고 정주학에 전념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의 저서 유명한 인문 지리서인 지행록은 우리나라 명산인 백두산을 비롯하여 봉래산 등을 두루 답사한 여행기이다. 얼마나 영특하였는지 할아버지가 임금님에게 받은 성리학책을 모두 손자인 이만부 선생에게 주었는데 이때 나이가 7-8세이니 오늘날 나의 막내 손자가 7세인데 아직 한글을 겨우익힌 상태에 비하면 천양지차다. 매우 영특한 선생님의 어린서절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서울 서강에 족한정을 새우고 연구에 몰두하며 윤휴, 허목과 교류했다. 이섬, 이서 등과 학문을 논했으며 이익과도 친히 지냈다고 한다. 이만부는 34세 되던 1697년(숙종 23) 조령을 넘어 삼촌하고 영남으로 살려고 내려왔는데 임금에게 인사차 대궐에 가니 숙종임금이 그곳에가면 그대들과 혼인 할 가문이 없다고 말해 이퇴계와 류성룡가의 오얏나무, 버들나무가 많이 있어 좋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삼촌은 안동으로 가시고 조카인 이선생님은 상주 노곡(현재 상주시 외답동)으로 내려가 생활했다. 상주는 남명 조식과 퇴계 학파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예언대로 본처가 사망하고 그의 후취부인은 퇴계학파의 종장인 서애의 증손녀였다.
* 생애와 살던 집
퇴직후 등산으로 취미생활 하다가 상주의 명산 (갑정산, 노음산, 천봉산, 식산, 백원산)을 답사하다가 식산에 오르고 난뒤 외답동으로 하산 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천운정사가 나타난다. 집에와서 검색해보니 이만부 선생님의 주거지였다고 한다. 아래 동네에 집을 지워 살았는데 화재로 이곳으로 이사했고 이곳도 또다시 화재로 인해 금릉 섬강으로 이사해서 살다가 다시 이곳으로 와서 집을 새워 6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영조때 성리학자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1700년경에 건립한 정사(精舍)로 상주 논실(外 )마을 끝부분 산아래 마을위 언덕에 자리 하였으며,이만부(李萬敷)는 1697년에 34세로 서울에서 상주로 이거하여 천운정을 짓고는 독서와 교육, 선비의 집회 장소로 사용 하였으며,학문과 교육 문학과 서도에 일가를 이룬 공간인 식산정사(息山精舍) 중 유일하게 보존 된 천운정(天雲亭)이며,이 정사의 원래 이름은 천운당(天雲堂)으로 1700년에 세워 졌으나 천운당보다는 천운정으로 널리 알려 졌고, 1846년과 1892년에 중수하였고, 1893년 5월에는 천운당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 사림에서 계를 조직 하기도 했습니다.
-겨울섬님의 네이트 불로그에서 퍼온글-
당시에 이와 같은 집을 짖고 저술하고 생활했다면 많은 자금이 필요했을텐데 그 자금은 조부와 부친이 양반이었고 높은 벼슬을 했어니 많은 재산을 상속 받았으리라고 생각되나 당시 경제 사정에 대한 기록은 없어서 추정할 따름입니다.
평생을 학문으로 일관한 선비로서문집 38권 이외에도 수사본(手寫本)을 합치면 140여권을 넘는다. 고전팔분체의 서예에 조예가 깊고 음악, 회화, 예악에도 실력이 있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 하였습니다.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息山文集), 역통(易統), 대상편람(大象便覽), 사서강목(四書講目), 도동편(道東編), 노여론(魯餘論)인문지리서인 지행록은 너무나 유명하다. 종합해보면 성리학, 실학, 어학, 서화, 음악 지리학, 역사 등의 다방면에 소질이있고 너무 대단하여 벼슬을 하지 않은 분인데도 만인의 존경을 받은분으로 산양면의 근암서원에 배향 되었습니다. 그분의 책들은 후손에 의해 잘 보관되어 있다.
식산 이만부 전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289호 (소재지:경북 문경시 신기동 67-7)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전적(典籍)13종 38책 및 유저 140여 권과 식산(息山) 선생 문집 판목 등의 전적(典籍)은 이만부(李萬敷)의 종손가에 남아 있는 문적이다. 이만부(李萬敷)는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옥(李沃)의 아들로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그의 가계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명문이었다. 그는 성리학자·실학자이고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사서강목(四書講目)>, <도동편(道東編)>, <식산문집(息山文集)> 등이 있다. 이만부(李萬敷)가 살았던 숙종 때는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사이의 정쟁이 치열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의 아버지가 20년 동안 귀향생활을 하자 이를 계기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학통은 남인학파에 속하였는데, 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의 학문을 이어받고 정시한(丁時翰) 등과 교류하였으며, 이익(李瀷) 등의 후배를 장려하였다. 이만부(李萬敷)는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나 1697년(숙종 23)에 상주로 낙향한 뒤 영남의 이현일(李玄逸)·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적 교류를 하며 한평생 재야학자로 지내면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영남학파의 학문적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잡록(雜錄)에 따르면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息山文集)』 20책 외에 『역통(易統)』 3권, 『대상편람(大象便覽)』 1권, 『사서강목(四書講目)』 4권, 『도동편(道東編)』 9권, 『노여론(魯餘論)』 1권 등이 있다.
-미탁님의 가페에서 퍼온글-
* 이만부 선생님의 묘역 소개
상주의 명산인 노음산의 등산을 북장사에서 여러번 오르다가 명당에 관리되지 않은 묘지가 있어서 궁금했는데 이 묘지 모습을 어느 불로그에서 보고 그무덤이 이만부 선생님의 묘지라는것을 영감으로 파악하여 오늘 답사했습니다. 북장사 절 뒤쪽 200미터 거리에 오리 농장이 있고 그곳에서 산으로 치고 오르면 명당이 존재하는 것을 이제 알았네요. 여러사람들의 글에 의하여 천주산 북장사 뒷산 언덕에 있다고 하며 안내판도 없다는 사진과 글을 보고 여태 궁금하고 속상하며 안타까워 했는데 이제사 발견했으니 실제 우리 조상님의 묘지보다 더 반가웠습니다. 등산로와 사진을 통해알려드립니다.
북장사 첫건물 과 천막에서 넘어가서 화살표대로 직진하다가 좌측 산으로 오름
내서면 북장 1길 317 네비 올리고 북장사 일주문 지나서 오르막으로 오르면 첫건물 주차장에 주차함 - 우측 버섯재배 검은 천막으로 들어가면 등산길이 보이고 앞의 낮은 안부에 오르면 전주와 대나무 밭 등장 - 직진하여 100미터 내려가면 첫민가 등장 -좌측 오솔길로 오릅니다. 물통과 연안이씨 묘지등장 -이후 200이터 급경사 오르면 멋진 명당 이만부 묘지입니다. 누가봐도 명당이면 명당을 모르면 이곳에서 명당 구경바랍니다. 그러나 묘지관리가 엉망 -명당은 오래되어도 잡목과 잡초가 안난답니다.
북장사 거쳐서는 등산로 폐쇄이므로 북장사 입구의 버섯재배 천막 앞이나 뒤로 가면 희미한 등산길 보입니다. 낮은 안부가 보이고 전주를 지나 대나무밭 앞의 남쪽으로 넘어가면 오리농장터가 나타나고 첫민가에서 좌측 산으로 오릅니다. 오를때 들머리 잘못 잡아 힘들게 올라 다시 우측 능선으로 빙돌아 내려옴. 실제로는 민가에서 300미터 거리에 존재하는 식산묘역이다.
오늘 2021년 5월7일(금) 임종인 선생님과 같이 이동한 경로입니다.
내서면사무소 옆 은척 농암가는 도로 따라가다가 2키로 후 봉천교회서 북장리 마을로 우측으로 2키로 오르면 북장사 일주문 등장
절 첫건물 사천왕문에 주차하고 절로 등산하로 들어가면 주지스님이 호통 예불자는 환영 - 등산이나 묘지가려면 절대 절로 들어가지말고 우측 버섯재배지 앞이나 뒤로 가면 등산로 보임
절우측 배수로 뒤에 버섯재배지 루핑천막이 보이는데 앞이나 뒤의 어디로 가나 희미한 등산로 보임-고개 넘어 마을이 있고 오리 농장터가 있으니 북장사 주지도 말 할 권리 없지요. 노음산 등산로도 민가 지나면 넓은 임도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니 등산로가 이곳에도 있네요.
루핑 집을 지나서 고개로 넘어가는 안부가 보입니다.
대나무 밭 등장하면 직진하며 가는데 검은 전기줄이 이어집니다. 반드시 직진하며 내려가시길 !!! 오리 농장 넘어가는 안부
100미터 낙엽따라 내려가면 첫민가 등장 -이곳에 오리농장이 있어 민가가 아직 존재
첫민가 앞에 향나무와 성모마리아상 존재
첫민가 도착 --좌측으로 산으로 오릅니다. 나무에 헝겁 매어놓아 들머리 표시
10미터 오르면 대형 상수도통 등장-동파 방지로 옷을 입힘
이만부 후손 연안이씨 묘지 등장 -- 여기서 등산로 따라 오릅니다. 길이 희미한 곳도 있지만 자꾸 오르면 저절로 능선 합류
자손 묘지에서 급경사로 300미터 힘들게 오르면 누구나 명당을 실감하게 하는 멋진 묘지가 등장하는데 이곳이 위성지도에도 보이는 식산 이선생님의 묘역입니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의 정송강 묘지는 관리소도 있고 계단, 이정표 등이 너무 좋은데 이곳은 시청에서 방치하네요.
연안이씨 문중에서도 관리 했으면 합니다.
명당은 바로 여기처럼 잡풀과 잡목이 없답니다. 그러나 묘지에 풀이 없는것은 관리되지 않은 탓입니다. 유명한 학자 징사 이선생 지묘라고 한자로 되었네요. 왜 징사인가요?
징사-학식과 덕행(德行) 혹은 절행(節行)이 뛰어난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천거(薦擧)되어 조정에 나아오는 것. 또는 그 선비를 말함. 한국고전용어사전
아들묘인지 바로 아래 허술한 묘지
명당인지 좌측룡 우백호가 뚜렷한 모양이 풍수가 아닌 나라도 명당임을 알게합니다. 명당을 잘 알았습니다. 명당을 보고싶은 분은 이곳으로 답사바랍니다. 교통이 좋습니다.
오늘 함께하신 시청 담당 직원 임종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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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한문학자나 금석학자가 보면 알기 쉽도록 비석 4면의 글씨를 나누어 촬영해서 올려봅니다.
오래된 비석이라 글씨가 많이 훼손되고 나누어 찍어 보기가 어렵지만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네이트 불로그- 태평연화의 인지초, 겨울섬, 더불어함께
네이트 키폐 - 함양학 연구원, 김천선비 문화 연구원, 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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