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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목사 신잠 선생님-조선시대

문장대 2022. 8. 5. 21:12

상주목사로 재임하신 신잠선생님은 세종때 문신 신숙주의 증손이다.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로서 한글 창제에 이바지한 분이지만 세조때 정승을 역임하였다.

신잠선생님 출생, 사망연도 : 1491년 1554년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靈泉子) · 아차산인(峨嵯山人),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자이고, 부친은 예조참판 신종호(申從濩), 모친은 세종대왕의 11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의 딸이다. 7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성종의 부마로 문아(文雅)가 높았던 맏형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에게 배웠다.

1513년 23세에 진사가 되고 1519년 현량과에 합격,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흥에 유배, 17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곳에서 묵죽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1537년에 양주로 옮겨졌으며, 1538년에 거주의 편의가 허락되어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살면서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으면서 소일하였다.

1543년에 다시 등용되어 호남지방의 태인 현감을 지냈는데 큰 흉년을 맞았을 때 백성을 잘 구활(救活)하여 품계가 더해졌으며, 이어 간성군수를 거쳐 상주 목사를 지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상주 목사를 지내면서 외임(外任) 관리 가운데 청렴하고 근신하는 관리로 뽑혀 향표리1) 1습을 하사받았으며, 상주의 백성들은 그를 추모하여 덕성비를 세웠다. 1668년에 장흥 예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신잠이 상주 목사로 근무할때 그의 선정은 상주백성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상주의 고을 곳곳에 18개의 서당을 지어 백성들의 자녀 교육이 크게 이바지 하였다. 상주의 곳곳에 아직도 신잠이 새운 서당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풍도와 아량이 있어 소문과 명망이 자자했다고 하며, 또한 식견과 도량이 명민하고 학식과 덕행, 재능과 기예, 지조가 있다는 평을 들었다. 정사룡(鄭士龍) 등 당대의 대표적인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신잠, 심매도

시 · 서 · 화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그림은 포도와 대나무를 잘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으로 이름이 났음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언급되었다.

"근래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다. 산수화에는 별좌 김장(金璋)과 사인(士人) 이난수(李蘭秀)의 아내 신씨(申氏)와 학생 안찬(安瓉)이 있고, 영모를 그린 잡화에는 종실 두성령(杜城令)이 있으며, 풀벌레 그림에는 정랑 채무일(蔡無逸)이 있고, 묵죽에는 현감 신잠이 있는데, 이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다."
近來士子之工於畫者最多 山水則有別坐金璋 士人李蘭秀妻申氏 學生安瓚 翎毛雜畫則有宗室杜城令 草蟲則有正郞蔡無逸 墨竹則有縣監申潛 此其最著者也

『패관잡기』 권2

신잠과 동시대인인 어숙권의 글에서 신잠의 묵죽이 두성령 이암의 영모화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에도 인용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신잠의 명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도 신잠에 "시에 능하고 묵죽을 잘 치고 초서를 잘 썼다[能詩善寫墨竹草書]."고 하여 묵죽이 그의 장기였음이 거듭 언급되었다.

또한 박상(朴祥) · 김인후(金麟厚) · 이황(李滉) · 임형수(林亨秀) · 정사룡(鄭士龍) 등 여러 문사들이 신잠의 묵죽도에 관해 제시(題詩)를 남기고 있어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화시들이 연작시가 많은 것으로 보아 병풍이나 화첩에 다양한 제재의 묵죽을 연작으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이황은 가장 많은 시를 남겨, 당대에 신잠 묵죽도를 가장 열렬히 상찬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나무와 영천은 본래 한 몸이었네, 한 몸이 변화하였으니 정신이 다 통하였구나. 한 폭 가득한 푸르른 허영(虛影) 어여삐 여길 만하네, 이것이 영천자 자신의 초상인가 싶구나."라고 노래한 시에서 이황은 신잠과 신잠의 묵죽화를 일심동체의 경지로 올려 보았다.

竹與靈川本一身 一身變化儘通神 可憐滿幅淸虛影 疑是靈川子寫眞

잠의 묵죽화는 그 자체가 가지는 예술적 성취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사된 작가의 고매한 품성과 덕행, 지조로 인하여 더욱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고화비고(古畵備考)』에도 신잠의 묵죽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먹의 농담이 고루 배합되었다"고 하여 먹의 농담대비와 조화를 잘 이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尋梅圖)>,<사계화조도>, <묵죽>을 비롯하여 일본 개인소장의 <묵죽> 그림이 전칭된다. <심매도>는 횡으로 긴 비단 두루마리에 나귀를 타고 눈 덮인 산 속의 흙다리를 건너는 인물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양끝에는 만발한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어, 이 그림이 첫 봄이면 파교(灞橋)를 건너 설산(雪山)으로 매화를 찾아 떠났다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고사를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산길과 다리를 횡으로 긴 화폭을 따라 수평으로 근경 처리하였고, 상단부는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만 능선이 보여 깊은 산 속임이 암시되었다. 눈 덮인 바위와 나무 아래에 청록의 채색으로 처리된 푸른 기운이 엿보여 이 작품이 청록산수화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산석(山石)과 인물의 묘사가 능숙하여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글씨도 잘 썼는데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여 글씨이건 그림이건 모두 팔분체로 휘갈겼으며 필법이 기이하고 절묘하여 애완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만년에는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난초와 대나무를 아주 정묘(精妙)하게 그렸다고 하여, 주로 예서와 초서를 잘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신잠은 18개의 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으니 그 서당은 다음과 같다.
1.수선서당(修善書堂)청리
2.백화서당(白華書堂)중모
3.도곡서당(道谷書堂)읍
4.용문서당(龍門書堂)공성
5.하곡서당(霞谷書堂)내서
6.석문서당(石門書堂)사벌
7.수양서당(首陽書堂)외남
8.노동서당(魯東書堂)읍
9.영빈서당(瀛濱書堂)영순
10.매악서당(梅嶽書堂)사벌
11.오산서당(梧山書堂)중동
12.고봉서당(孤峰書堂)낙동
13.봉성서당(鳳城書堂)단밀
14.봉암서당(鳳巖書堂)화서
15.송암서당(松岩書堂)외서
16.지천서당(智川書堂)읍
17.죽림서당(竹林書堂) 이안 무릉리

1개 서당은 불명.
고을 사람이 상주 옥성(玉成)서원에 향사하였다.

 

 

- 상주시 연원마을 연원 봉강가는 고개 아래의 하곡서당

 

                   상주시 서곡리에 도곡서당

 

상주시 모동면의 백화서당

 

 상주시 청리면 수선사당

 

상주시 이안면 무릉리의 죽림서당 
 
 

- 다음은 봉암서당-화동선교리 존재-2번째로가서 촬영했네요. 원통산은 오늘 들머리를 모르는데다  체력 저하로 못갔습니다. 오르려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귀가

화동면 선교리 봉암마을 봉암서당 (위 2사진은 문장대 사진이고 지붕있는 아래 사진은 도요새님의 사진을 복사했습니다. 사진 촬영중 개가 어찌나 짖어대는지 불안해서 봉암서원 전경을 촬영못했네요.

봉암마을 가는 길이 농로이고 차들이 길을 막아서 이리저리 가야하고 그곳  가기가  다소 힘드니 참고바랍니다.

 

  * 신잠선생님의 추가 연구자료

 

1749년(영조 25)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찬술한『상산지(商山誌)』「청대본」에는 모두 24개소가 등재되어 서당별로 위치와 창건년대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그 중에 17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중에 창설하였다고 한다. 청대본에 수록한 서당은, 하곡(霞谷) ‧ 노동(魯東) ‧ 도곡(道谷) ‧ 석문(石門) ‧ 수양(首陽) ‧ 수선(修善) ‧ 용문(龍門) ‧ 영빈(潁濱) ‧ 매악(梅嶽) ‧ 오산(梧山) ‧ 고봉(孤峰) ‧ 봉성(鳳城) ‧ 백화(白華) ‧ 봉암(鳳巖) ‧ 송암(松巖) ‧ 지천(智川) ‧ 죽림(竹林) 등 16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 중에 설립하였다고 하고, 뒤이어 벽익(闢翼) ‧ 반계(磻溪) ‧ 지산(芝山) ‧ 수계소(修稧所) ‧ 존애원(存愛院) ‧ 향약사(鄕約社) ‧ 향약당(鄕約堂)을 수록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조목수(趙沐洙)가 간행한『상산지』「구당본 초책(草冊)」과 1832년(순조 32)에 간행한『상주목읍지(尙州牧邑誌)』에는 서당에 관한 기록이 없다.
 『상주목읍지』가 간행되고 39년이 지난 1928년 일제강점기에 간행한『상산지』증보판의「3.학교조 서당목(三.學校條書堂目)」에는 청대본 그대로를 수록하고 8개 서당을 증보하였다.『상산지 증보판』에 추가 수록된 서당은, 운수(雲樹) ‧ 삼봉(三峰) ‧ 미산(薇山) ‧ 동강(東岡) ‧ 기산(箕山) ‧ 청림(靑林) ‧ 반암(盤巖) ‧ 무봉(舞鳳) 등 8개 서당이다.
 상산지에 수록되지 않은 전통서당으로 현재에 까지 남아있는 서당으로 외서면 이천리에 이천서당(伊川書堂)이 있다. 금중현 논문,「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의연사실」, 2016,『경상북도 상주시 국채보상운동 조사연구 보고서』, 2016.12.15. pp27~60. 에 의하면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당시 상주의 국채보상소가 이 마을에 설치되었고 이 마을의 이호서당(伊湖書堂)에서 의연금을 출연한 바 있다. 두 서당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호서당은 오늘의 이천서당의 전신으로 본다.    

 

 

 

 

신잠의 추가자료

신잠 선생은 시 · 서 · 화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그림은 포도와 대나무를 잘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으로 이름이 났음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언급되었다.

"근래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다. 산수화에는 별좌 김장(金璋)과 사인(士人) 이난수(李蘭秀)의 아내 신씨(申氏)와 학생 안찬(安瓉)이 있고, 영모를 그린 잡화에는 종실 두성령(杜城令)이 있으며, 풀벌레 그림에는 정랑 채무일(蔡無逸)이 있고, 묵죽에는 현감 신잠이 있는데, 이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다."
近來士子之工於畫者最多 山水則有別坐金璋 士人李蘭秀妻申氏 學生安瓚 翎毛雜畫則有宗室杜城令 草蟲則有正郞蔡無逸 墨竹則有縣監申潛 此其最著者也

』 패관잡기권2

 

신잠과 동시대인인 어숙권의 글에서 신잠의 묵죽이 두성령 이암의 영모화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에도 인용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신잠의 명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도 신잠에 "시에 능하고 묵죽을 잘 치고 초서를 잘 썼다[能詩善寫墨竹草書]."고 하여 묵죽이 그의 장기였음이 거듭 언급되었다.

또한 박상(朴祥) · 김인후(金麟厚) · 이황(李滉) · 임형수(林亨秀) · 정사룡(鄭士龍) 등 여러 문사들이 신잠의 묵죽도에 관해 제시(題詩)를 남기고 있어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화시들이 연작시가 많은 것으로 보아 병풍이나 화첩에 다양한 제재의 묵죽을 연작으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이황은 가장 많은 시를 남겨, 당대에 신잠 묵죽도를 가장 열렬히 상찬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나무와 영천은 본래 한 몸이었네, 한 몸이 변화하였으니 정신이 다 통하였구나. 한 폭 가득한 푸르른 허영(虛影) 어여삐 여길 만하네, 이것이 영천자 자신의 초상인가 싶구나."라고 노래한 시에서 이황은 신잠과 신잠의 묵죽화를 일심동체의 경지로 올려 보았다.

竹與靈川本一身 一身變化儘通神 可憐滿幅淸虛影 疑是靈川子寫眞

잠의 묵죽화는 그 자체가 가지는 예술적 성취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사된 작가의 고매한 품성과 덕행, 지조로 인하여 더욱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고화비고(古畵備考)』에도 신잠의 묵죽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먹의 농담이 고루 배합되었다"고 하여 먹의 농담대비와 조화를 잘 이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尋梅圖)>,<사계화조도>, <묵죽>을 비롯하여 일본 개인소장의 <묵죽> 그림이 전칭된다. <심매도>는 횡으로 긴 비단 두루마리에 나귀를 타고 눈 덮인 산 속의 흙다리를 건너는 인물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양끝에는 만발한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어, 이 그림이 첫 봄이면 파교(灞橋)를 건너 설산(雪山)으로 매화를 찾아 떠났다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고사를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산길과 다리를 횡으로 긴 화폭을 따라 수평으로 근경 처리하였고, 상단부는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만 능선이 보여 깊은 산 속임이 암시되었다. 눈 덮인 바위와 나무 아래에 청록의 채색으로 처리된 푸른 기운이 엿보여 이 작품이 청록산수화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산석(山石)과 인물의 묘사가 능숙하여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글씨도 잘 썼는데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여 글씨이건 그림이건 모두 팔분체로 휘갈겼으며 필법이 기이하고 절묘하여 애완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만년에는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난초와 대나무를 아주 정묘(精妙)하게 그렸다고 하여, 주로 예서와 초서를 잘 썼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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