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팔음지맥

큰곡재-614봉

문장대 2018. 5. 15. 21:11

* 등산지 :큰곡재-614봉-평산재-어만각재-양지리 뒷산고개

* 등산인 : 문장대 혼자

* 등산일 : 2018년 5월 13일,15일 2회

* 참고사항 : 본구간은 알바로 인하여 2번으로 나누어 탐방. 중간 탈출로를 발견하여 둘째날은 쉽게 평산리로 내려와 국도를 따라 걸어가서 차회수. 신잠과 상주서당에  대해 자료 기술


- 등산기-

  며칠전 개티재에서 양지리 뒷산 고개까지 내려와 양지리 터골 마을에서 선배님의 차로 무사히 귀가했다. 2일후  평산 소류지 - 어만각에에서 조금 오르면 어만각 고개에 주차하고 614봉 가기전 500봉의 멋진 조망처에 갔다가 뒤돌아와 다시 어만각에서 철탑거쳐 양지리 고개까지 다녀왔다. 500 봉거쳐-614봉-큰곡재(달밝음재)까지가 미답지가 되었다. 보통 등산인들은 한번에 주파하는 구간을 3번에 걸쳐 답사해야한다. 오늘도 금곡재 가기전 멋진 정자터에 도착하니 새로운 쉼터와 멋진 음료수 시설이 신설되었다. 거기서 일하는 분과 대화를 하고 식수를 맛보고 큰곡재에 주차하여 등산을 시작했다. 급오르막 등산로를 땀을 흘리며  헉헉대며 올랐다.  동쪽에 평산리와 서쪽에 명치리가 나무사이로 조망된다.

    큰곡재는 해발 높이가 있어 조금올랐는데 벌써 500봉 이 나타난다. 낙엽이 능선에 50센티 이상 쌓여 걷기가 무척 힘들었다. 한참 북진하여 오르내리는데 614봉 직전에서 길이 희미하며 두갈래다. 이정표도 없어 내 생각대로 내려가다가 이상해서 다시 능선으로 뒤돌아와 능선을 따라 급히 내려가니 알바이고 급 개골창이다. 다시 돌아가기는 힘이 빠져 골짜기로 내려갔다가 다시 급 오르막을 오르는데 힘이들었다. 순간의 선택이 이리 크구나 생각하며 알바 회복을 위해 높은 봉우리를 향하여 오르고 오르니 알바회복이다. 역시 리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 제대로 내려가다가 다시 능선으로 간것이 잘못이다. 억울해서 정상적인 길을 가보니 내가 처음 내려온길과 이어진다. 300미터 빙돌아 고생하며 알바를 회복했다. 그래도 614봉인 3면봉(3시군 경계봉 보은군-옥천군-상주시)에  도착했다.


  614봉은 조망이없고 선답자들의 리본이 많이 붙어 있다. 이 높은 산이름이 없는것이 이상하다.  점심식사를 여기서 하고 동북쪽 어만각을 향하여 내려오는데 오른쪽이 평산리 동네가 보이고 농토와 비닐덮힌 농토가 보인다. 2일전에 오르던 500봉을 지나 내려오니 며칠전 보던 등산로다. 계속 내려가도 되지만 우측 동네로 탈출하고 싶다. 어느 지점에 오니 유일한 벌목지대가 나타난다. 이상하게 왜 여기에서 벌목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주민들이 등산로 주변을 밝게 하기 위함을 직감으로 알았다. 왜 이높은 곳에 벌목을 했을 것인지 답이 나온다. 생각대로 벌목지대로 내려오니 과연 멋진 하산로이다. 반대로 평산리 안쪽마을인 이곳에서 614봉으로 올라 산채나 약초를 채취해도 된다. 우리 같은 등산인들은 하산로나 탈출로, 등산로이다. 어만각에서 큰곡재 사이 벌목지대는 오직 여기 뿐이니 힘든분은 이곳으로 나처럼 하산하면 된다.  막상 동네로 내려오니 동네개들이 일제히 짖는데 가관이다. 일단 동네로 내려와서 우측길을 살펴보니 차가다니고 버스도 타는 승강장이 있는 지방도이다. 오르막을 극복하고 평산리 승강장이며 도로옆 동네다. 오기전 정자도 있었다.


  벌목지대 능선사이 하산길로 내려와 평산 회동이라는 안동네를 거쳐 도로옆 동네 평산리에 도착하여 주차하 큰곡재를 향한다. 달밝음재라고도 하는데 넘에는옥천군  청산면 명치리다. 평산리까지 상주시내에서 버스가 다니는데 오후2시30분에 여기 평산리서 출발한다. 평산리서 차로 큰곡재 오르면서 계기로 재어보니 1.3키로이다. 길은 멋진 버스길인 아스팔트 길을 오르는데 오늘 햇볕이 보통이 아니다. 100미터 오른데 헉헉대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걷기가 힘들다. 버스는 안다니고 택시부르기는 좀 아쉽고 해서 100미터 오르며 쉬고 쉬었다. 13번을 쉬고 오르니 큰곡재 정자가 나타나고 약수터다. 물을 실컨 먹고, 세수도하며 30분이나 쉬었는데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200미터 올라가니 내차가 기다린다. 

  등산을 마친 이후 귀가길에 선교리에 있는 봉암마을을 찾았다.  좁은 농로길을 이리저리 가는데 차가 주차해서 길을막아 뒤돌아와서 바둑판처럼 연결된  다른길로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울사시는 등산인 이근진 선생님(도요새님)이 자세히 설명한 봉암서당이 존재하는데 조선 중종때 상주목사 신잠이 창설한 18개 서당 중 하나다. 며칠전에도 답사 가다가 농로길을 공사하고 또 봉암서원을 자세히 몰라서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원통산을 향하여 이리저리 가서 막다른 동네에가니 유명한 봉암서원이 존재한다. 원통산은 600미터 못되는 산이지만 오늘 체력으로는 힘들같아 나중에 답사하기로 하고 백두대간이 지나는 신의터재를 넘어 곧장 집에 도착했다. 오늘 상주의 온도는 30도이다.




2차례에 걸처 답사함 - 어만각고개서 큰곡재 사이 분통골로 내려오는 하산로 있음-벌목지대가 딱 한군데 있는데 그 능선으로 내려옴


2번에 걸쳐 탐방함  큰곡재와 어만각 재사이 중간쯤 능선에 벌목지대가 나타나는데 벌목한 것이 동네가지 이어짐-등산로가 아주 좋아서 혹시 힘이 빠진 분은 벌목지대 능선으로 하산함-골짜기가 아님

큰곡재 오르기전 정자 부근 시설 사진이 아래 몇 군데임


자손번성을 위한 시설


 생수가 철철







 614봉- 어만각 방향은 여기 바위옆으로 오릅니다-북진 방향인 팔음산 반대편 가는길


큰곡재 팔음산 오르는길














이구간에서 제일 높은 614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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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봉에서 내려본 보은 한중리


   벌목지대서 능선따라 내려오니 멋진 하산길이고 아래 재실과 어만각이 존재함. 어만각은 영광제실에서 500미터 거리 평산소류지 근방에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당시 무관이던 신유정이 사망하자 내린 만가를 보관한 비각-이고향에 영산신씨 후손이 입향하며 세운 역사사적

- 신유정(辛有定)   조진대 님의 카폐에서 퍼온글입니다.


1347(충목왕 3)∼1426(세종 8).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자는 득지(得止)이다. 광탄면 신산리에 묘가 있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 사람인데,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의 아들이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어, 남의 실수를 보고는 용납할 줄을 모르고 반드시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한 집안 사람이 궁핍(窮乏)함을 알리면 안색을 엄정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 하루에 두 끼씩 먹는다고 속언(俗諺)에 말하지 않았는가. 걸인이 죽어도 남는 옷은 있다고 하니, 굶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하였다.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정용 호군(精勇護軍)에 이르렀다.

병인년에 충청도 도원수 이승원(李承源)을 따라 왜구를 쳤는데, 승원(承源)이 전진하기를 주저하니, 유정이 칼을 빼어 승원이 탄 말을 겨누면서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원수(元帥)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도 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않으니, 국가에서 장수를 보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니 싸워야 합니다." 하니, 승원이 분격(奮激)하여 적과 싸워서 크게 이겼다.

또 남원(南原)의 싸움에서는 유정이 혼자서 말을 타고 적을 추격하다가 말이 넘어졌다. 그때 왜적이 유정의 배 위에 걸터앉아서 칼을 빼어 찌르려고 하니, 유정이 왜적의 불알을 움켜잡고 몸을 뒤쳐서 칼을 빼앗아 도로 찔렀다. 승원을 따라다닌 지 4, 5년 동안에 적과 싸운 것이 25번이나 되었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니, 유정의 공이 많았으므로 용감하다고 이름이 났다.

그 후 병조 의랑으로 옮겼고, 정축년에 국가에서 각도의 도절제사를 폐지하고 15진(鎭)의 첨절제사를 두게 되었을 때에 지혜와 용맹이 있는 사람을 뽑아 제수(除授)하게 되었는데, 유정이 맨 먼저 선발되어 이산진(伊山鎭) 첨절제사가 되었다. 무인년 가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가 9월에 파직되었다.

황엄이 강을 건널 때 객관(客館)에 깔 자리를 빼앗아 사물을 싸는 자가 있으므로, 유정이 장사(壯士)를 시켜 주먹질을 하니, 그 사람이 울면서 황엄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유정이 황엄의 앞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유를 상세히 알리니, 황엄이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도 무례한가." 하니, 유정이 관대(冠帶)를 벗어 땅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소방(小邦)에 의관(衣冠)을 내리시어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였는데, 지금 관인 등이 변경을 침요하여 멋대로 놀아나니, 이제는 의관과 예의로써 그들을 대우할 수 없습니다.

먼저 관인을 죽인 후에 내가 관인이 범한 것을 글로 써서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고, 나도 죽겠습니다." 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급히 장사(壯士)를 불러 말하기를, "허리에 찬 칼을 가지고 오라. 먼저 한 사람의 머리를 베고 강을 건너가겠다." 하니, 황엄이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드디어 울면서 호소한 사람을 매질하고는 술을 놓고 즐기다가 작별하며 말하기를, "변장(邊將)은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될 것이다." 하였다.


경인년 봄에 야인이 경원(慶源)을 침범하여 병마사 한흥부(韓興富)를 죽이니, 국가에서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을 보내어 도원수를 삼고, 유정을 발탁하여 좌군 도총제로 임명하여 부장(副將)으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11월에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로 옮겼다가 임진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였고, 갑오년에 평안도 도안무사가 되었다가 을미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고, 한가로이 있은 지 10여 년 만에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향년 74세이었다.

부의(賻儀)를 내리고 무절(武節)이란 시호를 내리니, 강강(剛强)하고 곧게 다스림을 무(武)라 하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절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아래 사진은 제실임--영광정-마을 주민들이 지은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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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통골 능선에서 벌목지대 등산로따라 내려오니 멋진 제실이 있네요




   평산리 동네 안에 있는 송골쉼터




봉암서당 -도요새님이 먼저 답사 가셔서 서당을 소개하여 나도 역사의 현장을 다녀가봅니다.  상주 신잠이 지었다고 합니다.


- 다음은 조선 명종-중종때 신잠(1491년-1554년)에 대하여 소개해봅니다.

신잠은 상주에서 군수하다가 이곳에서 병사한 목민관입니다.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은 초등학교격인 서당이 있고,  중등굥육기관인 향교가 있다. 상주는 조선시대에 비교적 큰 고을이어서 교육기관이 발달했다. 조선 중기 신잠은 상주군수로 재직하면서 관애 17서당을 신설했다.  함창 향교와 상주 신봉 향교는 중등 교육을 했고, 도남서원, 옥동서원, 임호서원 , 흥암서원 등 여러서원에서 역시 교육을 담당했고, 유명한 조선의 의료시설 존애원도 교육을 실시했다. 우선 신잠의 약력에 대해서 알아본다.

신잠()[1491~1554]의 본관은 고령(), 자는 원량(), 호는 영천자() 또는 아차산인()이라고 하며 아차산에 은거할 때 시와 서화에 몰두했다. 시·서·화 의 삼절()로도 유명하다. 또한 20여 년의 유배 생활을 끝냈을 때 신잠의 재능을 아까워한 임금의 배려로 태인 현감과 상주 목사를 지냈다. 그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같이 따랐으며 조정에서는 청백리()의 칭호를 내렸다. 그의묘는 구리시에 존재한다.

1749년(영조 25)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찬술한『상산지(商山誌)』「청대본」에는 모두 24개소가 등재되어 서당별로 위치와 창건년대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그 중에 17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중에 창설하였다고 한다. 청대본에 수록한 서당은, 하곡(霞谷) ‧ 노동(魯東) ‧ 도곡(道谷) ‧ 석문(石門) ‧ 수양(首陽) ‧ 수선(修善) ‧ 용문(龍門) ‧ 영빈(潁濱) ‧ 매악(梅嶽) ‧ 오산(梧山) ‧ 고봉(孤峰) ‧ 봉성(鳳城) ‧ 백화(白華) ‧ 봉암(鳳巖) ‧ 송암(松巖) ‧ 지천(智川) ‧ 죽림(竹林) 등 16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 중에 설립하였다고 하고, 뒤이어 벽익(闢翼) ‧ 반계(磻溪) ‧ 지산(芝山) ‧ 수계소(修稧所) ‧ 존애원(存愛院) ‧ 향약사(鄕約社) ‧ 향약당(鄕約堂)을 수록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조목수(趙沐洙)가 간행한『상산지』「구당본 초책(草冊)」과 1832년(순조 32)에 간행한『상주목읍지(尙州牧邑誌)』에는 서당에 관한 기록이 없다.
 『상주목읍지』가 간행되고 39년이 지난 1928년 일제강점기에 간행한『상산지』증보판의「3.학교조 서당목(三.學校條書堂目)」에는 청대본 그대로를 수록하고 8개 서당을 증보하였다.『상산지 증보판』에 추가 수록된 서당은, 운수(雲樹) ‧ 삼봉(三峰) ‧ 미산(薇山) ‧ 동강(東岡) ‧ 기산(箕山) ‧ 청림(靑林) ‧ 반암(盤巖) ‧ 무봉(舞鳳) 등 8개 서당이다.
 상산지에 수록되지 않은 전통서당으로 현재에 까지 남아있는 서당으로 외서면 이천리에 이천서당(伊川書堂)이 있다. 금중현 논문,「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의연사실」, 2016,『경상북도 상주시 국채보상운동 조사연구 보고서』, 2016.12.15. pp27~60. 에 의하면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당시 상주의 국채보상소가 이 마을에 설치되었고 이 마을의 이호서당(伊湖書堂)에서 의연금을 출연한 바 있다. 두 서당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호서당은 오늘의 이천서당의 전신으로 본다.  


금중현 선생님의 빛마당 카페에서 퍼온글입니다.  금중현 선생님은 상주문화원 부원장이십니다.


위의 서당 중 도곡서당, 죽림서당은 답사한 바있고. 봉암서당은 오늘 답사했습니다.


상주 이안 구미리의 죽림서당-신잠이 만든 서당


도곡서당

상주시 서곡동 도림사 옆의 도곡서당-상주군수 신잠에 의해 지어진 17개서당 중 하나 - 신잠 군수 대단합니다. 상주고을 곳곳에 교욱기관을 지은 멋진 목민관입니다.


봉암서당-화동선교리 존재-2번째로가서 촬영했네요. 원통산은 오늘 들머리를 모르는데다  체력 저하로 못갔습니다. 오르려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귀가

화동면 선교리 봉암마을 봉암서당 (위 2사진은 문장대 사진이고 지붕있는 아래 사진은 도요새님의 사진을 복사했습니다. 사진 촬영중 개가 어찌나 짖어대는지 불안해서 봉암서원 전경을 촬영못했네요.

봉암마을 가는 길이 농로이고 차들이 길을 막아서 이리저리 가야하고 그곳  가기가  다소 힘드니 참고바랍니다.


앞으로 신잠이 지은 서당 17개중 14곳 미답지 서당을 답사해서 올리겠습니다.

신잠은신숙주의 증손자이고 한명회의 외증손이다. 태인면사무소에  그의 목형이 전시되어잇다.

신잠은 18개의 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으니 그 서당은 다음과 같다.
1.수선서당(修善書堂)청리
2.백화서당(白華書堂)중모
3.도곡서당(道谷書堂)읍
4.용문서당(龍門書堂)공성
5.하곡서당(霞谷書堂)내서
6.석문서당(石門書堂)사벌
7.수양서당(首陽書堂)외남
8.노동서당(魯東書堂)읍
9.영빈서당(瀛濱書堂)영순
10.매악서당(梅嶽書堂)사벌
11.오산서당(梧山書堂)중동
12.고봉서당(孤峰書堂)낙동
13.봉성서당(鳳城書堂)단밀
14.봉암서당(鳳巖書堂)화서
15.송암서당(松岩書堂)외서
16.지천서당(智川書堂)읍
17.죽림서당(竹林書堂)화서 1개 서당은 불명.
고을 사람이 상주 옥성(玉成)서원에 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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