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백두대간

백두대간-남원-구례 지역 명칭 유래

문장대 2017. 10. 9. 16:48



남원시에 속하는 성삼재부터 경남 함양 병곡면 중재까지 등산하다보면 여러가지 재미있는 지역 명칭과 유래가 존재한다. 두산백과를 통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백두대간 함양 남원 구례지역 등산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성삼재 : 지리산 노고단 입구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이 이곳을 지켰다고 성삼재라 한다.지리산 능선 서쪽 끝에 있는 고개로, 높이 1,102m이다. 마한 때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던 고개라 하여 성삼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고갯마루에 주차장과 휴게소,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성삼재에서 천은사까지의 구간에는 1988년 개통된 지리산 횡단도로(지방도 861번)가 개설되어 있는데 거리는 약 10㎞이다. 성삼재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노고단~임걸령~삼도봉~토끼봉~명선봉~형제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의 지리산 주 봉우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는 걸어서 약 40분 거리이다.  성삼재는 전남구례 산동 좌사리가 주소지이지만 전북 남원 산내면으로 넘어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삼재 [性三峙] (두산백과)


* 정령치 : 마한시대 정장군이 점령했다고 정령치라한다.




* 고기리 : 고촌과 내기를 합쳐 고기리라 한다.

* 노치리 : 갈대가 많아서 갈대 노자를 인용해 노치리가 되었고 회덕리와 합쳐서 덕치리로 명칭개편


* 덕치리 : 회덕리와 노치리를 병합하고, 회덕과 노치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덕치리가 되었다. 회덕마을의 이름은 마을 주변에 있는 덕두산과 덕음산의 덕을 한 곳에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 해서 한자 표기로 회덕이라 하였다. 노치마을은 덕음산·지리산·만복대 등의 산줄기의 높은 곳에 갈대가 많아 갈재라고 하다가 ‘갈대 노’자를 사용하여 한자식 표기인 노치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밀양박씨들이 피난와서 정착하면서 형성되었고, 노치마을은 조선 전기에 경주정씨와 경주이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남원군 상원천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회덕리와 노치리를 병합하여 덕치리가 되어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와 남원군이 통폐합함에 따라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덕치리 [德峙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여원재 :  여원치라고도하며 이순신 백의종군길이 기도하다. 주변에는 여원치 마애불이 존재함 -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읍으로 가다보면 여원치(여원재)를 넘는다. 해발 477m의 여원치는 그 이름의 유래가 깊다.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 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길손이라면 반드시 거쳐야했던 이 고개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때 이곳 운봉현까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고개마루 주변 주막집을 들락거리던 왜구무리들은 주모에게 손찌검을 했다. 이에 주모는 날이 시퍼런 칼로 왜구의 손을 탄 왼쪽 가슴을 잘라내고 자결한다. 한편으로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운봉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자리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성계는 꿈에 나타난 이 노파가 왜구의 손찌검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자결한 주모의 원신이라고 믿고, 고개마루 암벽에 여상을 암각한 다음 주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을 지어 여원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연으로 여원치라는 명칭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이 여원치를 연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필시 여원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렇듯 이 고개 이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됐으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원재(여원치)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장교리 :

장교리는 본래 운봉의 서면 지역으로 지형이 긴 다리와 같다고 하여 장다리 또는 장교리라 하였다. 무학대사가 지형을 살펴보니 고남산() 줄기가 마을까지 뻗어 내린 모양이 마치 긴 교량을 가설한 듯 하므로 마을 이름을 장다리라 하였고, 이 마을은 장차 이씨와 김씨의 터가 될 것이라는 예언했다고 한다.장동리는 예로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했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장동이 되었다. 연동리는 연꽃 형국의 길지라 해서 연골, 연동 또는 삼막, 산막이라 하였다. 장교리는 삼국시대부터 천씨 세 가구가 움막을 치고 부족 사회와 같은 원시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가 자주 침략하여 급기야 운봉과 인월에 근거를 두고 약탈과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조정에서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토벌케 하였다.
당시 이성계 장군은 고승 무학대사를 대동하고 천하 명궁 퉁두란(이두란), 변안렬 등 무장들과 1,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을 통과할 때 고남산에서 3일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또 일설에는 이성계가 고남산에서 3일 기도를 드린 후 왜구를 물리치고 제왕이 되었기에 고남산을 제왕봉이라 불렀으며 제왕봉의 정기를 받아 마을이 부촌을 이루고 도적이나 재앙이 없이 대대로 태평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여원리, 장치리, 연동리 일부가 병합되어 장교리에 편입되었다. 장동리의 경우 최초의 입향조는 신씨로 알려져 있고 그 뒤 고씨가 터를 잡았으며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본래 운봉의 서면 지역으로 노루골 또는 장치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여원리와 장치리를 합하여 장동리라 하고, 연동리 일부가 병합되어 장교리에 편입되었다가 1972년 행정 분리에 따라 단위 행정마을로 독립된 곳이다.
조선시대 여원이 있던 연재는 30여 년 전만 하여도 남원시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휴식처인 주막이 있었던 마을로 하루 종일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은 집 터만 남아 있다.
연동리는 1400년경 홍정승이 전국을 유람하다 여원재 아흔 아홉 고개를 구비구비 돌아 고갯마루 여원에 이르러 말을 풀밭에 놀게 하고 잠시 휴식을 하였다. 다시 행차를 수습하는데 풀을 뜯던 말이 온데간데없으므로 수행원들이 말의 발자국을 따라 갔더니 지금의 연동리 106번지 지점의 따뜻한 양지 바른 곳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수행원들이 홍정승에게 아뢰자 홍정승은 이 곳이 길지임을 깨닫고 남양홍씨 자손을 연동리로 이주시켰다. 이후 홍씨 가문이 번성하여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홍씨들은 타지로 이동해 가고 1730년경 전주이씨와 김해김씨가 장교리에서 분가해 와 다시 마을을 형성하였다. 홍씨들이 3대에 걸쳐 막을 치고 살았다 하여 ‘삼막’이라 하였으며 ‘산막’이라고도 하였다.그 후 마을 뒤 노루봉과 마을 앞 연못의 연꽃이 유달리 아름다워 속칭 연골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마을 이름으로 되었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연동이 되었다. 본래 운봉의 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여원리, 장치리, 연동리 일부가 병합되어 장교리에 편입되었다.
연동리는 젖소 사육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마을로 전라북도 시범마을로 지정되어 보건소와 마을회관, 놀이터 등의 의료 시설과 문화 시설을 갖추는 등 전국적으로 새마을 연수가 한창일 때 연수생들의 견학 코스로 소개되었던 마을이기도 하다.장교리 마을 남쪽 할머니 당산이 있는 안산이 거북이혈이고 중고개 동쪽 산이 용혈이며, 연재마을 동북쪽 야산에 봉당혈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 세 야산 사이에 있는 들을 구렁터 또는 구룡봉터라고 부른다. 해발은 470m이다. 장동리는 마을 입구 논 한가운데 작은 흙 봉분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똥뫼라 부르지만 그 모양이 상서롭지 않다 하여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마을 내 장자터는 본래 운봉박씨 묘가 있던 곳인데 지금은 이장을 하였다. 장자터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묘를 조성할 때 마을 뒤 고개 너머에 있던 기묘한 형상의 쌍바위 중 하나를 옮겨온 것이다. 과거 기우제와 당산제를 지내던 앞, 뒤 당산이 있다. 해발은 475m이다.연동리는 마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앞 논에는 흙 봉분이 있는데 마을의 재난을 막고 행운을 기원한다는 뜻으로 만든 비보() 시설이다. 해발은 465m이다. 2007년 기준 면적은 395.8㏊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149세대에 304명(남자 142명, 여자 16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 고랭지 마늘, 채소이며 연동리는 젖소를 사육하는 축산업이 성하다. 장교리는 운봉읍 소재지에서 국도 24호선이 통과하는 서쪽 방면 4.5㎞ 지점에 위치하며 행정리로 장교리·장동리·연동리를 관할하고 있다.
 주요 시설 및 유적으로 장교리에는 예수교장로회 장교교회, 밀양박씨 효자비, 박강임 효자비, 장교 합민성과 고남산성()이 있다. 장동리에는 주지암과 주지사 포교당, 전주이씨 영해군파 제각인 감모재, 밀양박씨 묘각인 첨모재가 있다. 연동리에는 연동보건진료소와 연동 고분군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교리 [長橋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권포리 :

법정리로서의 권포리는 행정리인 권포리와 가동리로 나뉘어 있다. 가동리라 하여 ‘더할 가()’ 자를 쓰게 된 것은 권포리와 장교리(연동) 두 마을 사이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즉, 연동에서 더 가면 나오는 마을이란 뜻으로, 속칭 ‘덧골’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동이 된 것이다.고려 말인 1380년(우왕 6년) 인월면에 근거지를 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이성계 장군이 이 곳 고남산에서 전승 기도를 올릴 때, 주둔했던 병마의 식수로 쓰던 샘 주변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고남산은 이성계 장군이 왕업을 이룬 것과 연관이 있다 하여, 일명 태조봉·제왕봉이라 하였다. 제왕봉은 모든 산의 제왕이 되므로 인근 지형 역시 권력을 편다는 의미로 붙인 마을 이름이다. 정도전이 권포리()라 지었다 한다. 먼저 가동마을은 약 1710년경 함양군 뇌산마을의 삼언최씨가 지금의 마을 서쪽 ‘막골’에 막을 치고 살기 시작한 뒤, 이인좌의 난을 피해 김해김씨가 들어오면서 함께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또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운봉 좌영군이 함양의 반란군 최존서()를 공격하여 물리치자, 그 친족들이 난을 피해 ‘막골’로 들어와 막을 치고 처음 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 뒤 이곳을 ‘막골(마골)’로 부르게 되었다. 덧몰, 덤멀(몰)로 불리던 가동은 본래 운봉면 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동의 일부가 되었으나, 행정구역상 가동리로 명칭하여 권포리에 속하게 되었다.권포리는 성씨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 약 10여 호의 취락이 지금 마을의 서편 200m 지점 고남산 아래에서 시작하였다. 그 후 고남산에 큰 산사태가 일어 매몰되고 지금 위치에 400년 전쯤부터 권씨들이 터를 잡아 살아오고 있다. 본래 운봉군 서면 지역으로서 굄피기 또는 권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동과 연동, 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권포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권포리 618-1번지[권포2길 26-13]에 서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지금은 그 청사 터가 남아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매요리 :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 하여 ‘말 마()’자와 ‘허리 요()’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정유재란이 7년 만에 끝나자 고승 사명당(유정())이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였다.

사명당은 매화의 꿋꿋한 정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이 마을 사람들은 매화같이 선량할 것이니 지형과 인심에 맞게 매요리()로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그 후부터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매요리 [梅要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유치 : 물이 흐르듯 쉽게 오르내리는 고개로 장수번암 유정리와 운봉 매요리 사이에 있는 작은 재이며 행정 동네지명은 아니고 사채와 함께 고개이름이다 .


* 사치 : 남원평야와 아영면과 인월면~운봉고원 사이에 있는 분지벽의 고개로는 다리재(850m, 장수군 번암면 동화리~아영면 구상리), 꼬부랑재(665m, 장수군 번암면~아영면 성리), 복성이재(545m,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아영면 성리, 지방도 751호), 새맥이재(560m,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아영면 아곡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치재(515m,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아영면 아곡리, 광주 대구 고속 도로), 유치재(460m,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운봉읍 매요리, 지방도 743호), 통안재(670m, 산동면 월석리~운봉읍 권포리), 장치(505m, 이백면 양가리~운봉읍 장교리), 여원재(연재, 485m, 이백면 양가리~운봉읍 장교리, 국도 24호), 갓바래재(545m, 이백면 과립리~운봉읍 행정리) 등이 있다. 이러한 고개들은 모두 다 요천 쪽은 급경사이지만 운봉분지나 아영면과 인월면 쪽은 경사가 거의 없이 완만하다. 주천면 덕치리와 운봉읍 주촌리 사이의 지방도 60호선은 운봉분지의 곡중분수계로서 백두대간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4치 - 노치, 유치, 사치, 덕치(덕치만 공식 행정동네이고   노치는 덕치에 편입,  유치와 사치는 고개이름이다.



* 합민성 - 부녀자들이 합심해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雲峰邑) 가산리(佳山里) 가산(佳山)마을 동쪽으로 황산이 우뚝 솟아 있고 암벽이 발달한 마을 뒷산은 풍치도 수려할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산성을 쌓아 대치하던 요새지로 사연도 그윽하다. 가산산성(佳山山城)의 암벽 아래에서 황산(荒山) 위에 떠오른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면 가히 운봉의 10대 명승(名勝)이라 할만했다. 운성지(雲城誌)에 이곳 병풍암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의 경치를 운성 10경에서 병암망월(屛巖望月) 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가산산성은 진평왕이 백제 무왕의 공격을 받고 602년에 축성한 네 개의 성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어 운봉 지역의 중요한 수성(守城) 역할을 담당했다. 주변 지명(地名)을 살펴보면 당시 군사들이 말달리며 훈련하던 주마대(走馬臺)가 남아 있다.
가산산성을 북쪽으로 마주 바라보고 왼쪽으로는 번암면 유정리 사치마을로 넘어가는 외약성재가 있고 오른쪽으로 아영면 아곡리로 넘어가는 방고개(방현)가 있다. 방고개는 과거 아곡리에 권농병마가 주재할 때 방을 붙여 행정사항을 널리 알리던 곳이었다.
또한 황산 남쪽으로 인월역에서 운봉 관아를 거쳐 남원으로 길이 이어지고, 서쪽으로 매요리를 거쳐 통안재를 넘으면 남원 산동면 부절리로 통하며, 황산 서북쪽 양지촌에서 아영면 인풍리로 넘어가는 명석치가 왜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요충 역할을 하는 등 가산산성을 중심으로 이곳은 과거 교통뿐만 아니라 중요한 방어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사실 가산산성을 경계로 뒤쪽 장수군 번암면은 백제 땅이었고, 가산리는 신라 영토로 매요와 임리와 함께 지리적으로 양국의 국경선상에 위치한 마을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가산산성은 축성 때 많은 부녀자들이 합심하여 치마에 돌을 담아 올렸다는 전설이 있어 합민성(合民城), 합미성(合米城), 미성부(米城府) 등으로 불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조선조 성종 10년(1479) 곡부(曲阜) 공(孔)씨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여 움막을 치고 살면서 터를 잡았다.
멀리 남쪽으로 바래봉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위치한 가산 마을은, 인조 13년(1635)에 창건하고 배향인물로 정몽주·박광옥·황일호·변사정·노형필·서식 등 6현(賢)의 신주를 모셨다는  용암사우(龍巖祠宇) 터가 남아있고, 태종 10년(1410) 운봉에 최초로 향교가 세워졌던 명당 터이며 지금껏 많은 전란 중에도 큰 재앙을 당하지 않고 평안했던 낙지였다. 당대 거두의 문인묵객들이 이곳을 피해가기는 힘들었을 터, 한유에 비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이요 대 학자로 빠질 수 없는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1488 성종 19)도 운봉을 다녀갔다. 운봉(雲峰)에 부임하는 탁 사군(卓使君)을 보내며 읊은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예전에 운봉현을 지나다 보니 / 昔過雲峯縣
현이 두 도의 경계를 나누었는데 / 縣分兩道疆
산맥은 지리산으로 연하였고 / 山形連智異
지세는 함양과 근접해 있었네 / 地勢近咸陽

인가가 조밀하여 주민들은 많고 / 接屋民居勝
하늘에 치솟은 숲은 높기도 하지 / 參天樹木長
그대 보내서 지금 원으로 삼으니 / 送君今作宰
조정의 선발이 순량을 얻었구려 / 朝選得循良

 


* 방현마을 : 가산산성을 북쪽으로 마주 바라보고 왼쪽으로는 번암면 유정리 사치마을로 넘어가는 외약성재가 있고 오른쪽으로 아영면 아곡리로 넘어가는 방고개(방현)가 있다. 방고개는 과거 아곡리에 권농병마가 주재할 때 방을 붙여 행정사항을 널리 알리던 곳이었다.  지리산 휴게소 사치재서 2키로정도 백두대간 옆 마을이다.  복성이재서 대간길 오다가 지치면 방현마을에서 택시타면 해결됨 




* 고남산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과 산동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 846.8m이다. 가재~수정봉~고남산~여원치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북서쪽에 산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정상에 서면 운봉분지와 산동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 말에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고 나서 산신제를 올리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여 '태조봉' 또는 '제왕봉'이라고 불린다.

산은 돔(dome) 형태로, 중생대의 대보화강암인 조립질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사가 급하고 곳곳에 바위 덩어리들이 솟아 있지만, 정상부에는 풍화층(바위가 풍화 작용에 의하여 부스러져 이루어진 지층)이 형성되어 약간 평탄한 편이다. 산 정상부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남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동쪽으로는 운봉천과 남천(람천)이 되어 경호강을 통해 낙동강으로 빠져나가고, 북서쪽으로는 요천()을 이루며 섬진강에 합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남산 [古南山] (두산백과)



* 방아치 : 전북 운봉 고남산 아래 작은산인 방아산 산성으로 가는 고개가 방아치인데 동학혁명때 김개남장군이 크게 관군에 패한고개이며 장교리 뒷산이다.

* 성리 흥부마을 : 흥부가 박춘보인데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서 흥부마을이고 뒤산에 임도 옆에 그 무덤이 있다.  승용차나 택시가 갈 수있다.


* 복성이재 : 선조때 운봉에서 현감 벼슬을 살던 도씨성을 가진 선비가 임진왜란이 일으날 것을 대비하자고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민심을 교란시킨다고 삭탈관직하니 그 선비는 지금의 장수번암 복성이재에 올라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북두칠성 중 가장 밝은 별이 복성이라고 하는데 그 복성이 잘 보이는곳에 거쳐하였다고 해서 그 선비의 거처를 따서 복성이재라고 함. 실재 복성이재는 치재나 봉화산보다 낮은 곳에 위치했으며 지금은 장수 번암과 아영을 잇는 교통로에 위치한다. 백두대간이 이곳을 가로질러 지나므로 많은 대간인들이 이곳을 지나고 들머리 날머리로 한다.


* 봉화산높이 920m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 그리고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의 경계에 솟아 있다. 봉화산은 철쭉으로 유명한 산으로, 5월 중순이 되면 산 능선과 바위 언덕 곳곳에 군락을 이룬 철쭉들이 만개한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북쪽으로 장안산(1,237m)과 남덕유산(1,507m)·기백산(1,331m)이, 남쪽으로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남원시 아영면 성리 흥부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복성이재(545m)~치재~꼬부랑재(665m)~다리재(850m)를 거쳐 정상에 오를 수 있고,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신기마을에서 올라가면 다리재를 거쳐 정상에 닿게 된다. 복성이재 근처에 삼국시대의 산성인 아막성(, 전라북도기념물 제38호)이 있다. 아막성에서부터 복성이재를 거쳐 꼬부랑재에 이를 때까지 곳곳에 철쭉군락지가 있고, 장수 쪽에서 다리재로 오르는 길에도 철쭉군락지가 펼쳐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화산 [烽火山] (두산백과)




* 육십령 : 60명이 모여야 오고간다는 설,  장수와 함양관아서 60리라는 설,  굽이가 60개라는설, 고개근방에 60호가 살았다는 설이있다.

높이 734m. 육십현·육복치라고도 한다.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며 도적떼가 많아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이 모여야 한다고 해 육십령이라 했다. 소백산맥이 동쪽의 남강 상류와 서쪽의 금강 상류인 장계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낮아진 부분으로,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9m)의 안부에 해당한다.

소백산맥이 활처럼 둘러싸고 있어 다른 지방과의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영남지방의 주요교통로로, 조령(643m)·죽령(689m)·팔량치(513m) 등과 함께 영남지방의 4대령으로 꼽아왔다. 특히 육십령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였으며, 현재는 전주-대구를 잇는 국도가 지난다.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었던 고개였으며, 당시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다. 함양사근산성(사적 제152호)·황석산성(사적 제322호) 등 삼국시대의 성곽들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령이라고 하면 고개중 큰고개이고 물이 나서 사람이 살 수있는 곳을 령이라 합니다. 급한 고개는 치, 완만한 고개는 재

* 빼재(수령)  : 뼈가 많이 묻혀있다고 빼재, 빼어난 경치라고 빼재, 수령이라고도 하며 신풍령이라고도 함. 거창 고제면과 무주 무풍면사이 고개 - 고속도로 나기전엔 경남에서 서울로 가는 차들은 모두 이길로 다닌 서울가는 길. 


- 위의 명칭 해설은 두산백과와 네이브, 네이트 검색으로 작성하였으며 실제와 조금 다른 설명도 있을  같으니 참조바랍니다. 절대적 개념은 아닙니다. 설 들이 모두 그렇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