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 왕건
고려의 정책과 브랜드를 만들다
요약 태조는 고려를 세우고 결혼정책을 통해 호족을 통합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열어 민심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또한 통일신라와 차별되는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북진정책을 펼쳐 실제로 영토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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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고려를 세우고 자신만의 정책을 펼치다
태조 왕건
태조가 고려를 세우고 해야만 했던 일이 뭐였을까요? 역사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그렇죠. 그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감정이입을 해야 합니다.
태조의 정책은 크게 3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단 고려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호족들을 잘 통합해야 하고요(호족 통합), 오랜 전쟁에 지친 민심을 달래야 합니다(민심 안정).
민심을 얻지 못하는 국가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의 진리예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으니 고려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고려만의 색을 만들어나갑니다(new brand).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하다
먼저 호족 통합을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이용했습니다. 연애할 때도 ‘밀당’이 중요하잖아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연애건, 정치건 다 똑같은 거 같아요. 먼저 당근책부터 살펴볼게요. 호족들은 태조의 강력한 지지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실시한 게 결혼정책이에요. 말 그대로 각 지방에서 가장 잘나가는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한 거예요. 가족이 되는 것보다 더 큰 통합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배신하지 못하겠죠.
태조는 총 몇 명의 부인을 두었을까요? 자그마치 그 수가 29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대 최고 기록이죠! 이 얘기를 해주면 남학생들이 다들 부러워해요. 하지만 정략결혼으로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결혼해서 애도 낳아야 하는 게 과연 행복했을까요? 왕에겐 결혼도 정치의 연장이었습니다. 자식들은 얼마나 많이 태어났을까요?
무려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낳습니다. 사성정책1)을 실시해서, 왕건의 성인 왕 씨 성을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결혼정책과 유사하게 ‘패밀리’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거죠. 하지만 이런 패밀리의 확대는 큰 문제를 가져오고 말죠. 맞습니다. 태조가 살아있을 때야 괜찮지만, 죽은 이후엔 피비린내 나는 왕위 다툼이 있겠죠.
왕건과 장화왕후
다지쌤의 별별랭킹 고려 태조, 한반도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부인을 두다
1위. 고려 태조 29명
2위. 고려 현종 13명
3위. 조선 성종 12명, 조선 중종 12명
엄청나죠? 요즘이야 일부일처제니까 열 명 이상 비빈을 거느린 왕들이 방탕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세계사적인 수준에서는 결코 지나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약소합니다. 중국이나 이슬람제국의 경우 후궁은 최소한 수천 명이었어요. 심지어 종교적으로 일부일처제가 강요된 서구에서도 왕은 수많은 정부를 뒀거든요. 조선의 국력과 인구를 생각해도 수십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겁니다. 후궁의 수는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거든요.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 훈요 10조를 남기다
태조도 이걸 걱정해서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인 훈요 10조2)를 남깁니다. 어떤 글인지 볼게요.
1조.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하라.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를 존중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완전히 억압하거든요(억불숭유정책이라고 하죠!).
2조. 도선의 풍수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라.
풍수지리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 알 수 있어요. 실제로 고려를 건국한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풍수지리사상이었죠.
4조.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의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의관제도는 따르지 말라.
여기에선 두 가지를 알 수 있네요. 무조건 중국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즉, 사대적이지 않고 자주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을 여전히 견제하는 걸 알 수 있죠.
5조.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백 일 이상 머물러라.
서경은 서쪽 수도인 평양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북진정책이 보이네요!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로 호족들을 견제하다
반면에 채찍책으로는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호족들은 다 자신들의 출신 지역이 있잖아요? 호족들 중 중앙관리로 임명된 사람들을 출신 지역의 사심관(책임을 지고 관리하는 사람)으로 임명해서 그 지역을 책임지게 한 제도가 사심관제도입니다.
그럼 관직을 준 거니까 더 좋은 거 아니냐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여러분이 1학년 1반 출신의 힘깨나 쓰는 학생(호족)이었는데, 2학년으로 진급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교장선생님이 앞으로 1학년 1반을 책임지는 임원(사심관)으로 여러분을 임명한다고 한 거죠. 대신 그 반에서 교복을 줄여 입거나,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있으면 다 여러분 책임이래요.
그니까 감투를 씌워주고 족쇄도 같이 채운 겁니다. 또, 기인제도는 호족들의 자식들을 개경에 올려 보내서 왕실 호위 등을 맡긴 겁니다. 말이 좋아 왕실 호위지 한 마디로 인질입니다. 반란을 일으키면 ‘네 아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죠.
민생 안정을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불교 행사를 열다
민생 안정을 위해서는 뭘 했을까요? 힌트는 대통령 후보자들의 공약입니다. 그렇죠! 넘쳐나는 후보자들의 공약 중에서 유일하게 겹치는 게 바로 ‘세금 감면’일 거예요. V백성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이것만큼 좋은 정책이 없죠. 세금 많이 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후삼국 시대에는 각 지방에서 힘이 센 호족들이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마구잡이로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한숨이 끊이질 않았죠. 그래서 태조는 세금 걷는 원칙을 세웁니다. 이 원칙이 바로 ‘취민유도’예요. 말 그대로 ‘백성(민)들에게 세금을 취할 땐 정도가 있어야(유) 한다’는 거죠. 그 정도가 얼마였을까요? 바로 생산량의 10분의 1입니다. 또 흑창을 만들어서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불교 행사도 성대하게 열었어요. 종교를 이용해서 백성들 마음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려는 거였죠.
고려 브랜드 만들기, 북진정책을 추진하다
마지막으로 ‘new brand’ 만들기를 볼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이 나라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방향’을 세우는 겁니다. 그 방향은 고려라는 국호에 가장 잘 드러나 있죠. 고려는 고구려의 준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한국이라고도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걸 의미합니다. 예전의 통일신라와는 다른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려고 한 거죠. 그래서 추진한 정책이 바로 북진정책입니다. 고구려의 그 넓었던 북쪽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펼친 거죠. 실제로 청천강에서 영흥의 국경선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둬요.
고구려의 원수, 거란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다
또 고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서울로 삼고 중요하게 여겼어요. 당시 개경의 위치를 기준으로 볼 때 평양이 서쪽에 있어서 서쪽 수도라는 의미로 평양을 서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원수는 고려의 원수가 되겠죠? 고구려의 유이민들이 만든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북한을 멸망시키고 중국이 우리의 북쪽 땅을 빼앗았다면 우리들의 원수가 되겠죠? 그런데 거란은 고려와 잘 지내고 싶어 했어요. 짝사랑이었던 거죠. 거란에서는 고려에 아주 귀한 선물인 낙타를 무려 50마리나 선물로 보냅니다. 북방 민족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게 바로 가축이거든요. 그러나 거란이 미웠던 태조는 그 낙타를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놓고 굶겨 죽였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증오가 되죠.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런 크고 작은 분쟁으로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태조 왕건의 죽음, 왕위 다툼이 시작되다
그런데 태조 왕건이 죽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문제가 빵빵 터집니다. 큰 아들 혜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거죠. 왕자들만 25명이라고 했죠? 부인이 29명인 데다가, 그 부인들의 아버지들은 호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호족들이었잖아요. 그러니까 2대 왕인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사를 당하고요, 3대 왕인 정종도 내내 불안정한 왕 자리에서 덜덜 떨다가 3년 만에 병에 걸려 27세에 승하하게 됩니다.
태조와 신혜왕후를 합장한 왕릉인 현릉(顯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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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태조 총서
[네이버 지식백과]태조 왕건 - 고려의 정책과 브랜드를 만들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이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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