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동국통감

신라 56대 경순왕(신라 마지막 왕)

문장대 2025. 12. 20. 11:23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경순왕

[ 敬順王 ]

원전서지
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三國史記 卷第十二 新羅本紀 第十二)
시대명
신라
재위기간
927년 ~ 935년
연도
927년 ~ 978년
 

경순왕(敬順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전 임금님의 시신을 옮겨 서쪽 대청에 빈소를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敬順王立 諱傅 文聖大王之裔孫 孝宗伊飡之子也 母桂娥太后 爲甄萱所擧卽位 擧前王屍 殯於西堂 與群下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원년(서기 927) 11월, 임금의 아버지를 신흥대왕(神興大王),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大木郡)에 침입하여 밭과 들에 쌓아 놓은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元年 十一月 追尊考爲神興大王 母爲王太后 十二月 甄萱侵大木郡 燒盡田野積聚

2년(서기 928) 봄 정월, 고려 장수 김상(金相)이 초팔성(草八城)의 도적 흥종(興宗)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여름 5월, 강주(康州) 장군 유문(有文)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니, 고려 태조가 명지성(命旨城)의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나누어 보내 대목군의 벼와 곡식을 베어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武谷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二年 春正月 高麗將金相與草八城賊興宗戰 不克死之 夏五月 康州將軍有文 降於甄萱 六月 地震 秋八月 甄萱命將軍官昕 築城於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率兵擊走之 甄萱進屯於大耶城下 分遣軍士 芟取大木郡禾稼 冬十月 甄萱攻陷武谷城

3년(서기 929) 여름 6월, 천축국(天竺國)의 삼장(三藏) 마후라(摩睺羅)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義城府城)을 공격하자, 고려 장수 홍술(洪述)이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순주(順州) 장군 원봉(元逢)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었으나 원봉의 지난 공적으로 용서하고, 단지 순주를 현(縣)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加恩縣, 경북 문경)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三年 夏六月 天竺國三藏摩睺羅抵高麗 秋七月 甄萱攻義城府城 高麗將洪述出戰 不克死之 順州將軍元逢 降於甄萱 太祖聞之怒 然以元逢前功 宥之 但改順州爲縣 冬十月 甄萱圍加恩縣 不克而歸

4년(서기 930) 봄 정월, 재암성(載巖城)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후하게 예로 대우하고 상보(尙父)라고 불렀다. 처음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자,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생각하여 은총을 베풀고 칭찬한 것이다.

태조가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 병산(甁山)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임금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쪽 바다 연안의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降高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尙父 初 太祖將通好新羅 善弼引導之 至是降也 念其有功且老 故寵褒之 太祖與甄萱戰古昌郡甁山之下 大捷 殺虜甚衆 其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降於太祖 二月 太祖遣使告捷 王報聘兼請相會 秋九月 國東沿海州郡部落 盡降於太祖

5년(서기 931) 봄 2월, 고려 태조가 5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서울 근방에 와서 임금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와서 마주 대하였다. 정성으로 예우를 극진히 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의롭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으리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을 머물다가 돌아가자 임금이 혈성(穴城)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사촌동생 유렴(裕廉)을 볼모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엄숙하고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규율을 범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예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호랑이나 이리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王公)이 오니 부모를 만난 것 같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었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베와 비단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通謁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於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寖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無不嗚咽 太祖亦流涕慰藉 因留數旬廻駕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 隨駕焉 太祖麾下軍士肅正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 秋八月 太祖遣使 遺王以錦彩鞍馬 幷賜群僚將士布帛 有差

6년(서기 932)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시랑(執事侍郞) 김불(金昢), 부사로 사빈경(司賓卿) 이유(李儒)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六年 春正月 地震 夏四月 遣使執事侍郞金昢 副使司賓卿李儒 入唐朝貢

7년(서기 933), 후당 명종(明宗)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七年 唐明宗遣使高麗 錫命

8년(서기 934) 가을 9월,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운주(運州)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八年 秋九月 老人星見 運州界三十餘郡縣降於太祖

9년(서기 935) 겨울 10월, 임금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나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고립되어서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없겠다고 여겼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않아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곧 시랑 김봉휴(金封休)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고려 태조가 임금의 편지를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임금을 영접하게 하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임금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을 주고 큰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임금을 정승공(正丞公)으로 삼아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섬을 주고, 따르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고쳐서 경주(慶州)라 하고, 이를 정승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群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王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 齎書請降於太祖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十一月 太祖受王書 送大相王鐵等迎之 王率百寮 發自王都 歸于太祖 香車寶馬 連亘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十二月 封爲正丞公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고려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과인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그것은 매우 큰 은혜입니다. 원컨대 종실과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의 좋은 관계를 영원히 하고자 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였다.

“나의 큰 아비인 잡간 억렴(億廉)이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이 있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사람 외에는 집안일을 책임질만한 자가 없습니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현종(顯宗)의 아버지로서, 안종(安宗)으로 추봉된 사람이다. 경종헌화대왕(景宗獻和大王)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尙父令)으로 삼아 봉하였다. 정승공이 송나라 흥국(興國) 4년(서기 978) 무인에 이르러 돌아가시니, 시호를 경순(敬順)[효애(孝哀)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시조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3대로 나누니, 처음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中代)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下代)라고 하였다.

初 新羅之降也 太祖甚喜 旣待之以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昏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答曰 我伯父億廉匝干 知大耶郡事 其女子德容雙美 非是 無以備內政 太祖遂取之生子 是顯宗之考 追封爲安宗 至景宗獻和大王 聘正承公女 納爲王妃 仍封正承公爲尙父令 公至大宋興國四年戊寅 薨 諡曰敬順[一云孝哀] 國人自始祖至此 分爲三代 自初至眞德二十八王 謂之上代 自武烈至惠恭八王 謂之中代 自宣德至敬順二十王 謂之下代云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氏)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金氏)는 금궤 안에 들어있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政和)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臣) 김부식(金富軾)은 글 쓰는 임무를 띠고 보좌하여 가게 되었다.

우신관(佑神館)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舘伴學士)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 사람을 아는가?”라 하고, 또 이어서 “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 없이 임신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그림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지은 「동신성모문(東神聖母文)」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단지 그 시초를 고찰해 본다면,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검소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하게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宿衛)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의 교화를 습득하여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 군사의 신령한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어, 군사와 농사를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나라는 날로 쇠락하였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방탕하게 되어, 궁인과 가까운 신하를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술을 마시며 놀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금호(韓擒虎)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려화(張麗華)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1)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에게 귀의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만약 죽기를 다하여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우리 조정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의 마지막 왕인 전숙)가 오월(吳越) 땅을 송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자첨(蘇子瞻, 소식)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왕비와 첩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 輔行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講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之 可謂盛矣 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 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也 景哀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衎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嘉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 甚大 昔 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遠矣 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之報者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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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 원전
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 36년, 고려 태조 10년, 정해년(丁亥年), 927년
경순왕
신라 경순왕 2년, 후백제 견훤(甄萱) 37년, 고려(高麗) 태조(太祖) 11년, 무자년(戊子年), 928년
출처: 국역 동국통감
[네이버 지식백과]
경순왕 [敬順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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