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구간 :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쌍곡3거리 및 금호식당-쉼터-금호주유소-태성버스정류장-장풍교-쌍천따라 연풍방향-송덕리-갈금리-소금뎅이마을(금대회관)-일가정-유하리-유상리입구(오수회관)-쌍천낄-적석리 원형갈림 아래-쌍천자전거길-갈매실산 아래-고속도로 연풍터널아래-새로난길과 다리-성원가든-연풍우체국-하나로마트 및 농협-연풍성지주차장-연풍초등근방 작은 주차장 35,000보 16km정도거리 걷기함.
* 이동 내용 : 연풍시내의 연풍초등 앞 소형주차장에 주차하고 시내를 관통하다가 우측 코사마트에서 11시35분에 괴산 방면 쌍곡3거리가는 입석버스가 있다고 주민이 안내하여 조금 기다리다가 30분을 기다리니 걷는게 낫고 가다가 버스를 타려고 다시 뒤돌아와 호소사 열녀각에 도착했다. 이곳이 실제적인 둘레길 중요지점이다. 도로를 가로질러 북방향으로 가니 성원가던 식당이고 공사중이다. 아마도 자전거길과 둘레길을 겸한 다리를 건설하는 중이다. 따라서 이정표도 안보여 곧장가니 공사중이다. 다시 공사장을 피하여 도로따라 괴산방향으로 걷는데 둘레길은 아니다. 연풍끝 마을 배상리 마을에 승강장이 있어 괴산가는 버스를 탓다. 기사님에게 태성리가느냐고 문의하니 태성리를 모른다. 쌍곡3거리 이야기를 하니 칠성-괴산 간다고 한다. 안내양 있을때가 좋은데 기사님들은 대충 노선만 알고 운전하는 같다. 영풍에서 8구간인 안빈낙도길을 걸어서 가면 좋지만 공사중이고 길을 잃어 일단 쌍곡3거리의 태성리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탓다. 그곳 쌍곡3거리서 하차하여 연풍으로 내려오는 동쪽방향 8구간을 이동했다. 이곳 지리는 각연사와 칠보산-보배산 등이 있고 유명한 쌍곡계곡이 존재하여 지리는 훤하다. 수십번 다닌 그야말로 안빈 낙도길이다. 태성리까지 이정표보고 3km 정도를 가서 주민에게 둘레길을 문의하니 형제식당 주인 같은 분이 좌측 장풍교로 가란다. 둘레길이다. 장바우3거리인데 연풍 근방 유하리서 길이 합쳐지는데 좌측길이 옛날 길이다. 장풍교를 건너자 마자 파란2줄이 있는 자전거길 겸 둘레길인데 쌍천을 따라가면서 도로는 피한다. 쌍천의 고기이동로로 시설을 12군데 해놓아 민물고기들이 상하류를 오고가기 쉽도록 해놓았다. 철조망을 조성하여 사람들이 못가도록 철책선이 이어진다. 맑음 님과 허총무님의 리본과 둘레길 리본이 종종보이고 이정표가 있어 가급적 도로는 피하고 도로옆 자전거길로 주로 걷는데 쌍천과 나란히 걷는다. 나는 물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로 간다. 쌍천 건너편에도 도로가 있어 차들이 질주한다. 4차선 자동차 전용선과 합치면 3개의 도로가 괴산연풍이 이어진다. 또 자전거길까지 도로옆 냇가를 따라가니 4선의 길이다. 길도 많다. 둘레길은 자전거 전용길과 겸해있는데 한눈팔면 나도모르게 도로를 걷는 알바를 한다. 소금뎅이 마을인 금대리를 다리건너 이동해야 하는데 바로 우측으로 걸어서 그곳에서 또 알바다. 이후도 도로걷다가 우측에 소로가 있어 문이 열린곳으로 쌍천따라 가야했다. 적석리와서 도로를 가로질러 좌측에 묘지와 비각을 보며 다시 우측에 쌍천을 끼고 자전거길 겸 둘레길을 가는데 끝이없다. 연풍천주교회 첨탑이 저멀리 보여 안심이다. 끝없는 방천 길을 걸으니 마지막엔 공사중이던 곳에 길을 잘 만들어 놓았다. 다리는 완성되었는데 아직 미준공이다. 성원가던 앞의 다리는 곧 준공될 같다. 그렇지만 연풍에서 괴산방향으로 간다면 처음에는 햇갈린다. 새로운 다리옆에 흙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곳을 건너 좌측으로 가면 둘래길이다. 오전 11시25분에 괴산으로 가는 버스는 3군데 마을을 일부러 들린다. 처음에는 연풍에서 조금가다가 종산마을 다녀오고 회차하여 유하리에서 유상리 마을까지 다녀온다. 주민편의를 위한 같다. 마지막은 장암리 첫길에서 마을로 들어가 마을안을 빙돌아 괴산방향으로 나간다. 차비는 1,500원인데 동네를 3곳이나 들리니 불안초조하다. 과연 괴산으로 가는 차인가 싶다. 나는 차를 이렇게 타고 쌍곡리서 내려 다시 걸어서 연풍으로 이동했다. 그러니 시계방향 둘레길 이동이다. 안빈 낙도 8구간을 쌍곡3거리서 태성리-유하리거쳐 쌍천 좌측으로 이동한 셈이다. 이정표가 종종있어 큰 알바는 없었고 조금씩 도로를 걸었다. 둘레길은 도로는 피하고 가급적 쌍천방천길과 동네앞길, 자전차길을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여태는 좋은 길을 걸었는데 7구간-3구간이 남았고 거북한길 같아 다소 걱정이다. 오늘 최소 15km 걸었다.
연풍에서 버스를 타고 마을곳곳 드날들다가 칠성면 태성리 쌍곡3거리서 출발하여 연풍에 도착했는데 둘레길 시계방향 길로 이동하고 쌍천을 따라 위와 같이 검은화살표 방향대로 걸었다.
아래사진은 둘레길 전체코스지도이다.(오늘은 안빈낙도길8구간이다)
신비님의 글에서 복사해옴
쌍곡3거리 금호주유소 근방 사진
금호쉼터 근방 이정표 보고 태성3거리로 고고
느티나무가 있고 한때는 이곳을 괴산버스가 전부지나간 공용터미널
태성 버스역 3거리서 연풍방향 좌측도로 카공업사 지나 형제식당에서 좌측으로 장풍교 건너는 방향
장풍교 등장-건너자 마자 우측 쌍천 방천 자저거길로 내려감
이정표 지시대로 더리건너 바로우측 --똑바로 가면 도로이고 위험 천만 알바길-연풍은 가는길 이지만 둘레길은 우측소로 쌍천 자전거 방천길
무아지경으로 방천따라 감-우측은 쌍천-내내 따라감
쌍천 방천따라 이제 4km 옴. 아직 연풍까지 11km
임시 나무다리 지나고-차나 경운기는 노노
반가운 리본
운동좀하고 식사도 하고
아래 교동교를 지나고 -이정표 따라감
쌍천 건너편에 멋진 캠핑촌
송덕리 마을 지남-금대마을 소금 뎅이 마을2.5km 남음
갈길마을. 우측에 소로있는데 몰라서 도로따라 도보
연풍이 7km 남음
금대마을로 들어갑니다.
금대교를 넘어 마을회관을 보아야 하는데 모르고 우측 방천으로 알바
소나무가 멋있어서 이리로 옴
눈사람 바위가 평지에도 존재
갈금교 지나 도로따라 잘못옴
금대리서 이골목으로 와야되는데 버스간뒤 손든격-뒤돌아 보고 찍은 금대마을 가는 둘레길
두분은 잘도 오는데 나는 뻑하면 도로로 알바
드디어 유하리가 등장- 많이 오고간곳
도로따라가다가 뒤돌아서 방천길로 수정
풀길이 한참 이어짐-아구 발바닥이야!!!
첨 경치와 시설이좋고 리본도 보여요
유화교 도착-좌측으로 도로건너
멋진 소나무와 절벽에 하가정이 존재
바위에 새겨진 하가정-올라가고 싶지만 체력이 한계
유하리 가는도중 멋진 한옥-명우문
유하리서 유상리 가는 중에 조금 안쪽에 학교터 이마을은 오수마을
도착지인 연풍의 호소사 열녀각은 3.8km
다시 우측에 방천길로
방천따라 이정표 따라오니 이곳-연풍이 2km 남음
길을 간너서 자전거길 소로로 마냥갑니다. 주변에 비각과 멋진 산소존재-그런데 여기가 아직 적석리 ?
쌍천따라 방천길을 무지하게 걷습니다.
연풍터널 고속도로가 위를 지남
새로 조상되는 둘레길-좌측으로 가도 됨
종산마을에서 몇년전 마분봉 오르던길과 산 마루
아침에 저기 공사하기전 건너던곳
대충 둘레길이 있네요.
다리는 아직 완공이 안되고 시설만-저기빈집
공사차 다니는 흙길의 임시길로 연풍방향 가니 성원가든
주차한 연풍성지는 600m 거리
연풍시내버스 정차장을 가봅니다..
출발이나 도착의 중요지점인 연풍의 이근립 부인 호소사 열녀각. 병자호란시 전쟁터에서 전사한 남편의 시신을 찾아 산소를 쓰고 조정에서 열녀각 하사. 출정 전 사망을 대비해 남편의 옷에 헝겁을 달아 표시하여 시신을 거둠. 연풍의 자랑
대궐같은 연풍면 행정리 마을회관
연풍 우체국과 조합-하나로마터지남
연풍성지의 넓은 주차장 - 연풍성지와 이고을 현감을 지낸 단원 김홍도가 선정한 자랑스런 고을-호소사 열녀와 역사적인 장소
3년전에 다녀간 시루봉이 코앞이네요. 연풍성지에서
좌측의 파랑집 직행버스역은 달랑 건물만 남음-어릴때 서울행타고 이곳 오면 연풍의 수많은 장사꾼들이 온갖물건을 들고와 팔던곳인데 지금은 개미새끼 한마리 없는 폐허로 변했네요. 세월이 무상합니다.
연풍입구의 원형로타리 마스코트 연풍면 이정표
이정표 좌측에는 연풍현감을 지낸 김홍도의 민속화를 크게 재현했네요.-피곤해서 차안에서 촬영만 -역시책에서 본 그림
김홍도 그림을 보고 애마를우측으로 끌고 상주자택을 1시간만에 갑니다.
단원의 그림 일부
강세황 자화상 김홍도자화상
김홍도 표준영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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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초상화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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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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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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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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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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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능(士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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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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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檀園)[5], 서호(西湖), 취화사(醉畵士, 醉畵史),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단구(丹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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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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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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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김양기[6](金良驥, 1763년 ~ 18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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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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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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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이 단원 김홍도를 영풍현감으로 보냅니다.
자연경관 빼어난데 관광객은 적은 제천
“제천은 충청도에 속하지만 말씨는 강원도 사투리에 가깝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국경을 마주하는 경합지역이었기에
이곳저곳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입니다.”
충청?강원?경상도의 산악이 뭉친 곳에 제천이 자리하고 있다. 산세가 워낙 험하다 보니 삼국시대 각국이 굳이 성벽을 쌓지
않고도 지형을 살려 요새로 사용할 정도였다. 격동의 역사가 잠든 오늘, 삼국의 병사들이 행군하던 비탈길은 ‘자드락길’이
라는 이름이 붙여져 트레킹코스로 이용된다. 남한강 물줄기가 설악?월악?용두 산자락을 굽이도는 풍경이 한 폭의 산수화를그린다. 이 교수는 제천이 ‘단양팔경’, ‘청풍명월’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자연경관이 빼어난데도 관광객이 적다고 안타까워했다. 지역문화 발굴에 소홀한 탓이다.
“침체된 지역경제가 살아나려면 고유의 가치를 창조해야 합니다. 지역문화를 발굴해서 콘텐츠로 개발해야 하는 것이죠.
지역학에 바로 ‘가치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되는 제천의 유구한 역사는 문화상품으로 활용할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제천은 고대에 고구려와 신라
가 경합하던 무대로, 주인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던 고을이다. 태백산맥을 넘어 한강 이남에 진출하려던 고구려도, 한강
이북을 차지하려던 신라와 백제도 제천에서 창검을 겨눴다. 이 교수는 “자드락길도 역사 속 이야기를 녹여내면 관광객들
이 큰 호응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문화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읽어내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역사 속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다양한 매체에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 있어야 지역문화가 생기를 찾는다는 것이다. “정조는 제천과 단양을 아우른 단양팔경이 간절히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를 연풍 현감으로 임명하고 제천과 단양을 유람한 뒤 산수화를 그려 바치라고 했지요.”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김홍도가 그린 제천?단양의 풍광은 세계 무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제천시는 보물 같은 문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교수는 “그림 속 아름다운 물줄기를 따라서 뱃놀이를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 고장을 즐길 것”이라며 “관광과 예술을 결합하려는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출처] 정조가 김홍도를 현감으로 보낸 이유|작성자 봉지
김홍도는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이 되었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畫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畫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 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그리고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 작인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 주듯이, 주로 화보(畫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 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北宗院體畫的) 경향을 나타내었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된다. 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皴: 산봉우리나 바위 주름의 형태를 연꽃 잎새의 줄기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 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 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文: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 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群仙圖屛)」(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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