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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침입에 활약한 고려장군 양규와 김숙흥

문장대 2023. 12. 23. 19:26

* 거란의 1,2,3차 침입을  먼저 올리고 양규와 김숙흥 장군의 활약을 그려봅니다.

거란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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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1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거란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진화()·내원()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역참조항목

강감찬, 고인주, 김공석, 김숙흥, 보량, 양대춘, 정종

[네이버 지식백과] 거란의 침입 [契丹─侵入]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양규란 이름이 이름이 좋다, 양규는 김숙흥과  거란과의 싸음에서 게릴라 전으로 싸움마다 연전 연승하여 조선의 이순신이라고도 한다. 우리역사에서 전공하신 분 외에는 양규와 김숙흥 장군을 잘 모르는 같아 이번 KBS의 거란과의 전쟁에서 나오는 양규와 김숙흥에 대하여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 고려의 명장 양규
고려에 거란이 침입시 유명해진 사람은 서희장군과 강감찬 장군이다. 그러나 유격전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고  수많은 포로를 구한 2장군이 있는데 그 2분의 장군은 양규이다. 양규는 압록강 변경의 최고위직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흥화진을 지켜낸다. 거란군은 영규장군을 피해 흥화진을 우회하여 삼수채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패배시키고 곽주, 안주, 숙주 등을 함락시키며 계속 남하한다. 그러나 양규는 천여명의 병력으로 6,000명이 지키는 곽주를 되찾는다. 이후에도 1달 사이에 거란군을 7번이나 격파하여 포로를 구하고 말과 낙타, 병장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이루는 장군이다.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고 고려에서 물러난다. 이때 물러나는 거란군을 격파하다가 살려다라는 포로를 이용하는 전술을 이용한 거란족 군사들에 의해 김숙흥 장군과 영예로운 전사를 했다. 국가에서는 이들의 공로를 칭찬하여 해마다 곡식 100섬을 영규의 가족과, 김숙흥의 가족에게 50섬을 주도록 했다. 우리는 외교관 장군 서희와 감강찬 장군만을 알고 있는데  2분의 장군과 군인으로 죽어간 고려군과 백성들을 상기해야 한다. 고려는 북진정책을 취하여 고구려의 뒤를 이어받는 국가이지만 건국초기에는 후백제와 많은 싸움을 하였으나 결국은 승리하여 고려를 건국하고 송나라와 친교를 맺으며 평화를 유지했다. 1대 태조 왕건부터 7대왕 목종까지는 태평성대를 유지했다고 보다. 그러나 그러나 강조의 변으로 목종을 폐위하고 8대왕 현종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거란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송나라가 쇠퇴하고 여진족과 거란족이 흥해지고 있었다. 나중에 송나라를 이기고 요나라로 이름까지 바꾼 거란은 압록강 근방에서 발해의 유민이 새운 정안국을 멸하면서 강성해져서 송나라와 친교를 맺고 고려를 복속시키려고 하였다. 이때까지 송나라와 친교하던 의리의 민족 고려는 거란에게는 그리 좋지 않게 지냈다. 아마 한족이 아닌 거란족이라고 그런같다. 함경도와 만주에 있던 여진족과도 별로였던 고려였다. 여진족은 그리 큰힘은 못쓰고 거란족은 강성해져서 고려를 괴롭혔다. 목종의 어머니인 측천무후가 조정을 마구 흔들어대며 김치양이라는 요승과의 관계도 이상했다. 보다 못한 도 순변사 강조는 목종을 폐하고 절에가서 목숨을 이어가던 왕족인 현종을 8대임금으로 모셨다.  이를 계기로 잘난척하는 거란족은 고려에 80만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입했다. 소손녕을 적장으로 하여 80만 대군을 작은 나라인 고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거란족의 제1차 침입이다.

거란족의 발전과 건국

거란족은 북위 때 요하 상류의 시라무렌 강 연안 일대에서 어렵과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때, 거란은 여덟 부족으로 나뉘어 있으면서 중원과 밀접한 왕래를 하고 있었는데, 주로 말과 가죽을 가지고 와서 교역하였다. 그리고 돌궐의 침입과 수의 공격을 받게 되면서 타격을 받고 부족이 점차 연합하게 되었다. 당 정관 2년(628)에 거란 추장 대하()씨 마회()가 돌궐을 배반하고 당에 귀부하였다. 당은 그 곳에 송막도독부()를 설치한 뒤 연맹장인 굴가()에게 도독의 칭호를 주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도독부 아래 10개 주()를 두고 거란 각부의 부락장을 각주의 자사로 임명하였다. 현종 때 대하씨 연맹이 와해되고 질라부() 우두머리의 지지 아래 요련()씨가 부락 연맹을 재건하였다.
이 때, 거란 사회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원 지역은 군벌의 혼전으로 북방의 한인들이 전란을 피하여 거란 지구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피난할 때 선진 생산 기술로 거란의 사회·경제 발전을 촉진시켰다. 거란 8부 가운데 질라부는 중원에 가까이 있어, 이 곳에 한인들이 더욱 많이 이주해 왔고, 그 결과 질라부가 최강의 부족이 되었으며, 부족장을 야율()씨가 맡아 왔다. 901년에 야율아보기()는 질라부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어 질라부의 좋은 경제 조건을 바탕으로 각 부족을 통일하고, 주변의 실위(), 해(), 여진(), 토욕혼()을 정벌하였다. 또, 남침하여 다수의 한인들을 포로로 잡아 왔다. 이 때 일부 지식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는 한연휘(), 한지고() 등도 있었다. 이들은 야율아보기의 세력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907년에 야율아보기는 연맹의 군사 대권을 장악하였으며, 요련씨는 연맹장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각부의 부족 연맹장은 야율아보기를 새로운 부락 연맹장으로 선출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난하() 일대에 농업을 장려하고, 한족 한연휘 등을 등용하여 전장 제도를 제정하고 중원의 한족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남아 있는 부락 연맹장을 제거하고 거란 각부를 통일하였다. 916년에 연맹장을 세 번이나 연임한 야율아보기는 이 해 부락 연맹의 세선() 제도를 폐지하고 한인의 왕조 체제를 모방하여 정식으로 대거란국()을 세운 뒤 스스로 천황왕()이라고 불렀으며, 연호를 신책()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요 태조이다. 2년 후에 '서루성(西, 상경 임황부)'을 건설하고 이 곳을 수도로 정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나라를 세운 다음 밖으로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는데, 중원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중원으로 들어가 많은 한족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말년인 926년에 후방의 근심을 제거하고자 동쪽의 발해()를 정벌하여, 그 곳에 동단국()을 세우고 태자 야율배()를 동단왕으로 봉하였다. 그리하여 거란국은 중국 역사상 북방 지역을 처음으로 통일한 셈이었으며, 그 면적은 북송의 두 배나 되었다. 이후 북방 지역은 비교적 안정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거란족의 발전과 건국 (중국사, 2008. 6. 20., 신승하, 위키미디어 커먼즈)

 

형편없던 유목민이 중원의 혼란한 틈으 타서 중국 북방을 처음으로 통일하였다. 야울아보기가 대거란국의 초대 왕인 천황왕이 되었다. 기세등등하던 거란왕은 송과 친교를 맺고 여진을 꼼작 못하게 하면서 고려를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여러가지를 내새우다가  고려에서 무력으로 왕이 바뀐  것을 기회로 제1차 거란족 침입을 시작했다. 적장은 소손녕이다. 이때의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가진 무장인 장군은 도순변사 강조였다. 도순변사 강조는 거란의 칩입에 대비하고 용맹하게 싸웠으나 40만 대군에게 패하고 사로잡혔다. 이때 다른 장군들은 항복하여 거란의 군사로 투항했으나 강조는 끝내 버티다가 교수형으로 살해되었다. 왕을 바꿀 수 있는 무장이었지만 80만 대군의 침입에는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요왕은 죽이기가 아까워 항복을 권했으나 끝내 강조는 죽음으로 대항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서희장군이다. 서희는 담력이 크게 소손녕을 불려들여 "  거란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니 우리는 형제이고 내가 형의 나라 민족이니 엎드려 절까지 하려고 했다"  그말에 일리는 있었나 큰절을 소손녕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강동6주가 원래 고려의 땅이니 돌려주고 여진족을 물리쳐 달라고 했다. 여진족은 고구려 후예가 아니라고 말했다. 말인 통하는 소손녕은 감읍하여 강동6주를 고려에 넘겨주고 퇴각했다. 비록 1차전투에서는 강조가 순국했으니 서희의 노력으로 강동6주를 되 찾았다. 이것이 유명한 서희징군의 외고 전술이었다. 여진족도 물리치고 애매한 강동6주를 고려가 쟁취했으니 대단하다. 거란의 1침입은 993년에 시작되어 몇년간 지속되었지만 현종왕은 무사했다. 그러나 1010년

 

강동6주를 반환받고 11대 문종때가지 동해까지 찬리장성을 쌓은 지도-강동 6주: 용주, 철주, 곽주, 귀주, 통주, 흥화진
위 강동6주는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으로 고려에 다시 복속시킨 현재 평안도 고을이다.
 
양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사 소설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그가 승리로 이끈 전투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드라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010년 음력 11월, 황제가 이끄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왔다. 정변으로 왕위에 갓 오른 초보 임금 아래 중앙집권의 기틀조차 미약했던 고려. 중원에서 송나라를 몰아내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거란. 확연한 우열 속에서, 양규는 최전방 요새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맞이했다. 화포가 없던 시절이긴 하나, 겨우 3000명 남짓한 군사로 일주일간 이어진 거란 40만 대군의 파상 공세를 버텼다. 예상과 달리 첫 관문부터 꼬여버린 거란 황제는 만약을 대비해 병력의 절반만 데리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이후 거란군은 고려의 본진 통주에서 30만 대군을 대파하며 진격해 음력으로 이듬해 1월 1일 수도 개경에 입성한다. 현종 임금은 서둘러 몽진을 떠나야 했다. 파죽지세의 거란군은 그러나 열흘 뒤 철군을 결정한다. 양규의 맹활약이 결정타였다. 군사 1700명을 이끌고 거란군 6000명이 주둔한 곽주성을 습격해 탈환하며 보급 및 퇴로를 끊었기 때문이다. 성을 함락하려면 통상 10배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성과였다. 이후에도 퇴각하는 거란군을 쫓아 소수의 병력으로 끈질긴 게릴라전을 벌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 3만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려사).”

◇“책임감 강한 공직자가 필요하다”

KBS 사극의 동명 원작 소설 ‘고려 거란 전쟁’의 저자 길승수 작가는 “양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흥화진에 머무는 대신 성 밖으로 나와 거란군을 계속 공격하잖아요. 무모할 정도로요. ‘왜 자기 살 궁리를 안 하지?’ 싶었어요. 그분은 자기 책임을 다한 겁니다. 양규의 직책은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였습니다. 서북면과 서북면의 백성을 지키는 일, 내가 맡은 임무는 목숨 걸고 완수한다는 자세.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고, 그래서 대중이 반응하는 게 아닐까요.”“얼마 뒤 거란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해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1011년 음력 1월 28일,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의 최후다. 그러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거란군의 피해는 컸고 재침공까지 3년이 걸렸다. 그사이 고려는 일전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후 벌어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등의 승리는 이 같은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영웅의 예우, 지금의 우리는…

사극 '고려 거란 전쟁' 촬영장에서 양규(지승현·왼쪽)와 현종(김동준)이 웃어보이고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현종은 전사한 양규를 공신으로 대우하고 유족에게도 후한 포상을 내렸다. /KBS

 

 

1019년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치하하고자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했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봉해 기리는 등 융숭히 예우했다.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했고, 손수 교서를 지어 양규의 처 은률군군 홍씨에게 하사했다. “그대의 남편은… 송죽 같은 절개를 지키며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밤낮으로 헌신했다. 지난번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며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훈작과 관직을 올렸으나 다시 보답할 생각이 간절하므로 더 넉넉히 베풀고자 한다. 해마다 그대에게 벼 100석을 하사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며 존재가 희미해졌을 뿐 고려시대 내내 양규는 구국의 영웅으로 숭상됐다. 양규의 후손들도 왕실의 포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전쟁과 역사’ 저자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은 “고려의 양규와 조선의 충무공만 봐도 나라를 지켰으면 정치적 배경을 막론하고 공에 걸맞게 예우했고 그걸 못 하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 우리는 이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행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숙흥[  ]

김숙흥 생애 및 활동사항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친히 40만대군으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고 돌아갈 때, 귀주()의 별장으로서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병을 쳐서 1만여 명을 베었다.이듬해에 거란의 선봉을 애전(: 평안북도 의주) 지방에서 격파하여 1천여 명을 베었으나, 갑자기 거란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당시 서북면도순검사(西使)였던 양규()와 함께 전사했다. 그 공으로 장군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이씨에게는 한평생 해마다 조 50석을 상으로 주었다. 1019년 공신녹권()이 내려졌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에 녹권되었다. 또한, 문종이 즉위하자 그 공을 추념하고 표창하여 장려하기 위해 그 형상을 공신각()에 그려 넣도록 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김숙흥 [金叔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거란족은 고려를 3차레 침입히였는데 제3차 침입 시기와 침입과정이 글쓴 분에 따라 각각 달라서 고교국사에서 다루는 거란의 3차침입을 아래에 기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