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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등 좋은글

강감찬과 거란과의 귀주 대첩(3차대첩)

문장대 2023. 12. 20. 23:23

거란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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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1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거란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여버렸다.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진화()·내원()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역참조항목

강감찬, 고인주, 김공석, 김숙흥, 보량, 양대춘, 정종

[네이버 지식백과] 거란의 침입 [契丹─侵入]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거란의 3차칩입에 거란을 격멸한 강감찬은 지금의 서울대 입구 낙성대에서 탄생하였다.  우리나라 전쟁영웅인 살수대첩 승리자 을지문덕  귀주대쳡의 승리영웅 강감찬, 임진왜란시 한산대첩의 이순신과 함께 3대  전쟁영웅이다. 991번의 외침을 당하면서 크게 승리한 전쟁은 이3대첩이다.  이번에 KBS에서 거란과의 전쟁이 방영돠는데 때마추어 강감찬에 대하여 글을 올려봅니다. 서울 관악산아래 낙성대에서 태어날때부터 별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지금도 낙성대이다. 서울 봉천동에서 신림동으로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보면 낙성대가 실제로 있다. 필자가 젊은 시절  이곳을 자주 다녔다. 이유는 맛잇는 짜장면집이 근방에 있었다. 당시20대  직장에 근무하면서 2아들을 낳을때인데 낙성대근방에서 기를 얻기 위해여서도 자주 다닌곳이다. 강감찬이 서기931년 탄생하고 1031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감강찬 아기가 태어날때 중국사신이 북두칠성 4번째 별 문곡성이 안보이더니 여기 떨어졌다고 감탄했다. 얼굴은 천연두로 박색이었고 키는 작았으나 범상한 인물이었다.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설화가 되었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고, 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과 명신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강감찬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기록은 물론이고 문헌 혹은 구비설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곡성의 빛을 타고 태어난 고려의 명재상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영웅이 탄생하는데 신화가 없을 수 없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꽤 유명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소개 하고 있다.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 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며, 그가 재상이 된 후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고려사]에 전하는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 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낙성대에서 찾을 수 있다.

강감찬이 태어난 서울 낙성대공원에 있는 동상. <출처 : Sasha Friedman at ko.wikipedia.com>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1439~1504)이 쓴 [용재총화()]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에 있습니다.”라고 했다.[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을 주관한다.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계속되는 거란의 침입

거란은 우리의 북방국가인 발해를 망하게하고 약해진 송나라와 친교하며 계속 우리나라를 괴롭혔다. 송나라는 문화를 숭상하여 거란족을 마음대로 못했으니 송나라를 숭상하던 우리나라는 거란을 별로로생각하였다, 그러니 자존심 상한 거란의 왕들은 친조를 요구하여 자주침입하였다. 드디어 993년 소배압의 동생이 침입히였으나물리쳤다. 1016년에는 소합덕이 2차로 칩입하여 서희가 담판으로 강동6주를 도리어 되찾아왔다. 당시는 친조를 약속하고 친밀하게 지내자는 약속이있었다.

거란의 성장

고려 북쪽에 있던 거란족은 세력을 점차 키워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송나라였는데, 군사력이 약해 고려에 군사적 도움을 받기를 원했고,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길 원해 서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거란족은 송나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송나라를 도와줄 고려가 걱정되어 먼저 고려를 치고자 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세 차례나 침입했다.

서희의 담판

993년 거란의 침략 의도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끊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챈 서희는 거란족의 장군 소손녕을 만나겠다고 자청했다. 소손녕은 서희에게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라고 했지만 서희는 당당하게 "나는 고려 왕이 보낸 사신이니 사신으로 대우해 주시오."라고 말했고, 고구려의 후손임을 내세워 오히려 영토를 얻어 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서희는 국제 정세를 읽는 눈이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불리한 처지에서 벌인 담판이었지만, 송나라와 거란이 전쟁 중인 관계를 잘 이용했다. 거란이 고려 정복에 큰 힘을 쏟기 어렵고, 고려를 견제하는 것에 만족하리라 판단하여 오히려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즉 고려가 송나라와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돌려받기로 한 것이다.거란은 뒤늦게 이 지역이 중요한 군사 지역인 것을 알고 되돌려 달라고 했지만, 고려는 거부했다. 고려는 이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하고 약속과 달리 거란에 사신을 보내지도 않았다.

강동 6주와 천리장성

거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양규

고려가 거란과의 약속을 어기고 사신을 파견하지 않자 거란은 1010년 다시 쳐들어왔다.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왕위에 앉힌 '강조의 정변'을 트집 잡아 또 쳐들어온 것이다. 이때 고려는 개경까지 함락되고, 왕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떠나야 했다. 결국 앞으로는 왕이 직접 거란을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러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끝까지 저항하여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그리고 돌아가던 거란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며 백성을 구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규가 지키던 성은 물자가 부족해졌지만 양규는 수많은 화살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 전사했다.

강동 6주 얻고, 천리장성 쌓고 : 거란의 침입과 격퇴

태조 때 외교의 기본 방향은 북진이었습니다. 서경(평양)을 거점으로 한 북진 정책은 거란과의 대립을 가져왔습니다. 송이 중국을 통일한 뒤 거란과 맞서고 있을 때, 광종은 송과 손잡고 거란을 견제했습니다. 한편, 압록강 중류에는 발해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이 있었습니다. 정안국도 송과 손잡고 거란에 대항했습니다. 원래 거란이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송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와 정안국이 송과 연맹하여 거란에 맞서자,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란은 먼저 정안국을 멸망시킵니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고려를 침입했습니다.거란의 1차 침입은 성종 때였습니다.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합니다(성종 12년, 993). 서희가 눈부신 외교 활동을 벌여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거란은 줄곧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요(거란이 세운 나라 이름)와 통교하기를 원했습니다. 서희는 소손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으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였소. 압록강 유역도 우리 땅인데 여진이 그곳에 살고 있어 길이 막혀 있으니 당신네 거란과 수교를 할 수 없소.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돌려주면 수교하겠소."당시 거란은 송과 대치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와의 전쟁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거란은 여진 땅을 차지하여 통로가 열리면 거란과 통하겠다는 고려의 약속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주장은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소손녕의 군대가 스스로 물러났고, 고려는 강동 6주의 관할권을 얻어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었습니다.

강동 6주와 천리장성

그러나 고려는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지 않고 요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미루었습니다. 그러자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했습니다(현종 1년, 1010). 거란의 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았습니다. 강조의 정변은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왕위에 올린 사건입니다. 거란의 2차 침입에 강조가 맞서 싸우는 데 패배하여 개경이 함락됩니다. 현종은 멀리 나주까지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양규 등이 국경 지방에서 거란의 후방을 공격하자 거란이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보급로가 끊겨 후퇴할 길을 잃을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현종이 직접 요를 방문할 것을 조건으로 2차 침입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종이 요에 가는 것은 고려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습니다.거란의 대대적인 3차 침입이 이어졌습니다(현종 9년, 1018).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거란군은 곳곳에서 고려군의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여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해 거란으로 돌아간 사람이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합니다(1019). 그 뒤에도 거란은 국경 근처를 자주 침입하여 충돌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용감히 대항했습니다. 거란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끝에 고려와 요는 결국 국교를 맺었습니다. 이로써 고려 · 송 · 요 사이에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천리장성 유적

표면적으로는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힘썼습니다.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았습니다. 나성은 도시 전체를 둘러싼 성입니다. 그리고 국경 지대에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 천리장성은 서쪽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긴 성입니다. 덕종 2년(1033)에 공사를 시작하여 12년 동안 공을 들여 정종 10년(1044)에 완성합니다.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동시에 막기 위해 쌓은 성이었습니다.

1차칩입시 적장-소손녕(80만 대군) 2차침입-소합탁, 3차침입 적장 소배압(소손녕의 형)10만대군

[네이버 지식백과] 강동 6주 얻고, 천리장성 쌓고 : 거란의 침입과 격퇴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2009. 2. 5., 김아네스, 최선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