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여행 이야기

경북선 역 근방 명승지 소개--예천역

문장대 2017. 4. 6. 19:15

@ 예천역(醴泉驛)은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있는 경북선의 역이다.

도로교통의 발달로 인해 이용객의 수는 적으나 모든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한다.

 

1928년 11월 1일 : 개업

@ 예천역 주변 관광지

예천도 오래된 양반의 고을이라 전통을 중시하는 곳이 많다. 따라서 많은 관광지가 산재해 있다. 곤충의 도시라서 곤충박물관이 있다.

- 금당실, 용문사, 초간정, 저수령, 효도마을, 양수발전소, 삼강주막, 은풍고항치에 산림체험장, 사동리 유원지, 회룡포, 진호양궁장, 학가산자연휴양림, 생태체험관, 예천 천문대. 석송령, 예천온천, 명봉사와 명봉계곡, 효자면의  효자촌, 보문사 지장보살 그림, 천주사, 용두산, 백두대간의 솔봉, 흙목산, 문복대, 묘적령, 저수령의 새해맞이제단, 지보면의 한우식당, 풍양의 상풍교, 경북도청.

@ 상리면은 효자면으로 바뀌고, 하리면은 은풍면으로 이름이 바뀜

@ 고항치에는 둘래길이 있어 아주 멋진 산행코스이다. 주변에 폭포도 있다.

 

-예천 관광지 투어코스 : 

탐방 코스는 

석송령 → 개심사지 5층석탑 → 용문사→ 초간정→ 예천권씨 종가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 회룡포 → 삼강주막 등이다. 

이 중 가장 비중이 큰 곳은 단연 용문사(龍門寺)

용문사는 10여 점의 국보급을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다.

[출처] 경북 예천 역사문화 탐방 |작성자 들녘바람

예천군은영조때 아쉽게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강등된 고을이다.

 

@ 예천군의 유물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마제석기가 출토된 용문면의 고인돌군이 있고, 예천읍 백전리에는 삼국시대의 석실분이 있다.

국방에 관한 유적으로는 용궁면의 향석리토성()과 예천읍 서본리의 흑응산성(,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4호)이 있다. 그리고 학가산성·예천봉수()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각탱화가 용문면 내지리의 용문사에 있다. 용문사 경내에는 용문사대장전(殿, 보물 제145호), 예천용문사대장전목불좌상 및 목각탱(보물 989호), 예천용문사팔상탱(, 보물 제1330호), 예천용문사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445호), 높이 4.2m의 원기둥을 주축으로 한 팔각의 대장경 보관대인 용문사윤장대(, 보물 제684호), 세조가 용문사의 잡곡세를 감면해 준 교지인 예천용문사교지(, 보물 제729호), 예천용문사천불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9호)가 있다.

이 밖에도 확실한 축조 연대(1010년, 고려 현종 1년)를 알 수 있는 예천읍 남본리의 개심사지오층석탑(, 보물 제53호)이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예천동본동삼층석탑(보물 제426호),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인 감천면 증거리의 한천사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이 있다.

그 밖에 보문면의 예천간방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수계리의 보문사극락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3호)·보문사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6호), 은풍면의 탑동석탑, 지보면의 지보리석탑, 용궁면의 향석리삼층석탑 등이 있다.

불상으로는 동양 최고()의 철불로 9세기 중엽에 제작된 감천면 증거리의 한천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667호)이 있다. 용문면 선리에는 청룡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24호)·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25호)이 있다.

그 밖에도 예천읍의 예천동본동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호), 동본리의 동악사석조비로사나불좌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6호), 풍양면의 예천흔효리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와룡리의 예천와룡동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5호), 용궁면의 예천향석리석조여래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7호), 보문면의 예천승본동석불입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51호), 유천면의 화전동석불좌상 등이 있다.

한편, 효자면 명봉리에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와 명봉사문종대왕태실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가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용궁면 향석리의 용궁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0호), 무이리의 무이서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0호) 예천청주정씨재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이 있다. 그리고 예천읍 백전리에 예천향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왕신리에 신천서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9호)이 있다.

그 밖에도 호명면 내신리에 노봉서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보문면 미호리에 이정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4호)·미산학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지보면 만화리에 만의서재(), 용문면 저곡리에 예천야옹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0호), 원류리에 예천감로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2호)가 있다.

정자로는 죽림리에 초간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호명면 백송리에 선몽대(), 풍양면 와룡리에 용두정() 등이 있다.

초간정은 「대동운부군옥」의 저자 권문해()가 1582년(선조 15)에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70년 권문해의 유고를 보관하기 위해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에 점점이 놓인 기암괴석과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맑은 물이 절경을 이룬다.

그 밖에 예천읍 고평리에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정탁()의 초상화인 약포영정(, 보물 제487호), 약포유고 및 문서(稿, 보물 제494호), 약포사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2호)이 있다. 그리고 보문면 미호리의 윤별동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3호), 예천읍 왕신리의 김영열좌명공신교서및회맹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5호)이 있다.

고건축물로는 용문면 죽림리에 예천권씨종가별당(, 보물 제457호), 예천권씨종택(, 중요민속자료 제201호), 예천권씨병암정및별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3호), 예천권씨영사당종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4호), 구계리에 의성김씨남악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7호), 대저리에 미산고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상금곡리에 추원재 및 사당(,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2호)·반송재고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2호)이 있다.

그리고 저곡리에는 춘우재고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2호)·연곡고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3호), 풍양면 삼강리에 삼강구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4호), 유천면 율현리에 율현동물체당(, 중요민속자료 제174호), 호명면 송곡리에 연안이씨별좌공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1호), 용문면 상금곡리 의 상금곡사괴당고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7호), 예천읍사무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0호), 은풍면 부초리에 함포재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5호), 용궁면 덕계리에 예천덕계리관물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5호)이 있다. 또한, 용문면 죽림리에는 대동운부군옥책판고본(稿, 보물 제878호)·초간일기(, 보물 제879호)가 보존되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예천읍 통명리에 예천통명농요(, 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 남본리에 예천궁장(,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6호), 풍양면 공덕리에 예천공처농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가 있다.

명승으로는 용궁면 대은리의 예천회룡포(, 명승 제16호)가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감천면 천향리의 석송령(, 천연기념물 제294호), 용궁면 금남리의 예천금남리의황목근(, 천연기념물 제400호), 용문면 상금곡리의 예천금당실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 용문면의 예천죽림리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10호)와 예천사부리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11호)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천군 [醴泉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퍼온글

 

@ 예천군의 역사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그 당시는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없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점차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 사람이 많이 거주했던 것 같다.일찍부터 소국(, )이 형성되어 변진 미리미동국()이 이 곳에 비정되고 있다. 이 나라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예천지역은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 수주군(: 지금의 예천읍) 축산현(: 지금의 용궁면)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수주군은 예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영안현(: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가유현(: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은정현(: 지금의 안동시 풍천면)·안인현() 등을 영현으로 삼아 다스렸다. 후삼국의 쟁패기에 이 지역은 일찍이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927년(태조 10) 왕건이 친히 용주(: 지금의 용궁면)·근품성(: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지역을 함락하여 고려에 편입시켰다. 그 뒤 예천군은 보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안동부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태자의 태()를 안치한 것으로 기양현()으로 승격되었다. 1204년(신종 7) 남도초토병마사(使) 최광의()가 경주의 신라부흥군과 이 곳에서 싸워 승리한 것으로 인해 지보주사()로 다시 승격되었다. 축산현은 995년(성종 14)용주로 개편되어 자사()가 임명되었으나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고, 1012년용궁군()으로 고쳐져 상주목에 속하였다. 용궁군은 1172년 감무()가 파견되어 속군의 위치를 벗어났다. 고려 말에는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운 이방실()이 개선하다가 김용()의 모함으로 이 곳에서 피살되었다. 고려 후기의 읍격()을 그대로 유지하던 보주는 1413년(태종 13)보천군()으로 고쳐졌다가 1416년 다시 예천군이 되었다. 용궁현은 1413년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당시의 토지와 풍속에 대해서는 예천군이 비옥·척박이 반반이나 평이하였고, 용궁현은 척박하였으나 화목하였다고 한다.

호구 수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예천군이 1,092호 1만 1613명, 용궁현이 396호 4,545명이었다. 예천군의 권씨·윤씨가 관료로 중앙에 많이 진출했다고 한다. 윤상()·권맹손()·권오복()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용궁현감 우복룡()이 예천·용궁의 향병()을 이끌고 6월 15일 용궁으로 진격해 온 적장 요시가와()의 군대를 무찔러 이 지역은 적으로부터 무사하였다. 이 때 이유()·이응() 등의 의병투쟁도 있었다. 한편, 예천군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1729년(영조 5)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38년에 군으로 환원되었다.1895년예천군과 용궁군으로 편제되어 안동부에 속하였다. 1896년예천군은 3등군, 용궁군은 4등군이 되어 경상북도에 속하였다. 1906년동로면과 화장면을 문경군에, 다인면을 비안군에 편입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궁군이 예천군에 통합되는 동시에 안동군에서 감천면을, 풍기군에서 상리면과 하리면을 편입하였다. 1937년예천면이 예천읍으로 승격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신교육이 보급됨에 따라 유지들이 남명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노력했으며 항일의병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4월 1일부터 12일까지 군 내 각지의 장날에 수많은 주민들이 모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도 관할 행정구역 내의 부분적인 이동이 있었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산군 1,000여 명이 7월 28일보문면을 공격해 오자 홍종관() 등 경찰 7명이 끝까지 분투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3년개포면 상동이 예천읍에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는 보문면 고평동이 예천읍에, 보문면 마촌동이 감천면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용문면 두인동이 두천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하였으며, 1989년에는 감천면 미석리 일부가 영풍군 장수면에 편입되었다. 1990년 1월 1일예천읍의 대심1리가 대심1리와 대심3리로 분리되었으며, 1999년 4월 10일유천면의 연천리가 연천 1리와 연천 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0년 10월 1일호명면 월포리 일부가 예천읍 청복리로 편입되었다. 2016년 2월 1일 상리면은 효자면으로, 하리면은 은풍면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천군 [醴泉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