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역사 등 좋은글

조선시대 붕당 정치의 원인과 사례

문장대 2023. 6. 10. 17:27

선조대  이조전랑 자리에 임명이 예정된 사람이 김효원 이었습니다. 장원급제 출신에다 평소 행실도 올발라서 젊은 사류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죠. 그런데 김효원이 이조전랑 자리에 오르는 걸 심의겸이 사람이 반대한 거예요. 이 심의겸은 외척 출신입니다. 을사사화 이후 외척이라면 치를 떨던 사림 중에는 심의겸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김효원은 이조전랑이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듬해 김효원의 후임자로 심충겸이 거론돼요.이름에서 눈치 채셨나요? 심충겸은 심의겸의 동생입니다. 그러자 김효원이 반대를 한다. 이때부터 여론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심의겸은 외척인사인데 외척 결사 반대를 외친 후자는 동쪽에 집이 있는 김효원과 뜻을 같이 한다고 해서 동인이라 불렸다. 이때부터 붕당정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산군때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사람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당시는 왕권이 강하여 왕인 연산군에 의하여 주도되어 뚜렷한 붕당정치는 아니었다. 이후 기묘사화때도 조정암의 개혁을 두고 붕당정치가 조금 보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시작은 선조8년 1575년 부터 사림세력들이 자기들의 뜻에 따라 상대편을 모함하고 자기편의 이익을 취한 것이 원인이다. 그 결과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기축옥사를 일으켜 1,000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이후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고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정여립의 사건으로 북인들이 무고하게 참살당하였다, 남인과 북인은 당시 관리들이 남쪽과 북쪽에 살아서 역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대북과 소북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이고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계파로서 영창대군이 사망하여 대북이 승리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인조반정이후 인조가 즉위하여 붕당정치가 줄어들었으나 효종때 예송논쟁으로 또다시 서인과 남인이 대결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크나큰 피해를 주었다. 예송논쟁은 1년상이냐 3년상이냐를 두고 당파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이후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옥사 사건으로 남인과 서인이 교대로 등장하고 망하는 정치가 숙종-경종까지 이어졌다. 장휘빈의 사약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것도 붕당정치의 피해이다. 선조이후 경종때가지 붕당정치는 우리나라 정치사에 많은 오점을 남긴 사례이다. 경종이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세제인 연잉군이 등극했는데 그분이 영조이다. 그동안 붕당정치로 많은 피해사실을 경험한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붕당정치는 잠시 멈추었다. 정국도 안정되어 평화가 지속되었지만 영조시대에서 다시 노론과 소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론은 개혁적이며 현실적이라 청과의 평화를 모색하였지만 소론은 골수 성리학적이며 대명의리론을 내새운 세력이다. 

영조때 역사상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은 임오화변이다. 임오화변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이다.  임오화변에 대한 설명을 말하고자 한다. 

 

* 시파 vs 벽파는 정조때 부터  노론에서 분열된 것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그 처분에 대한 견해차이를 두고 갈라진 세력이다.  사도세작가 죽은 이후의 붕당형태임을 알아야 한다.. 

* 계기 :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선왕 영조의 처분을 지지파/반대파로 분열

- 시파 : 영조의 처분에 반대 (사도세자 옹호)

- 벽파 :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망케한 처분에 찬성

 

영조는 사도세자를 엄하게 키우며 한편으로는 의심했다.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영조를 크게 두려워했으며, 15세 때인 1749년부터 13년 동안 대리청정을 수행하면서 영조와 갈등을 겪었다. 심한 압박 속에 병을 얻은 사도세자는 비행을 저질렀는데, 서로 대립하는 당파였던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 그의 비행이 이용되었다.

 

*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갈등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쓴 편지에서 ‘내 나이가 15세인데 아직 (할아버지인 숙종의 능)을 참배하지 못했다’고 썼는데, 이는 그가 영조의 불신을 받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영조가 병상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영조에게 약을 올릴 것을 권했지만 사도세자가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다.

 

* 사도세자의 병과 비행

 

부인헤경궁 홍씨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옷 입기를 꺼리거나 특정 옷감을 꺼리는 의대증(衣帶症)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증상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그 전부를 지어낸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사도세자가 스스로 써서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신이 울화증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조선왕조실록에도 사도세자가 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그의 아들 정조도 아버지의 병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다. 또한 정조가 직접 지은 여귀를 달래는 제문에서도 "모년(某年 1762년(영조38)을 말함) 이전의 의지할 곳 없는 귀신을 제사하여, 환후(患候)가 침독(沈篤)했음을 알게 하노니,"라며 사도세자에게 죽은 억울한 원혼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병이 심했음을 알아달라고 하고 있다.심리학자 강현식은 사도세자의 심리상태를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병으로 판단하며 집안 내력이라고 보았다. 사도세자는 궁녀와 궁인을 죽이는 등 비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1762년 5월 22일(양력 6월 14일) 영조가 알게 되었다.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노론이 반대하는 소론이 논쟁을 벌였다.

 

* 임오화변은 임오년에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죽은 사건이다. 

 

임오화변은 붕당정치의 피해라기보다는 영조임금과 사도세자와의 갈등때문이다. 그러나 임오화변으로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었다.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뒤주 속에 가뒀다.8일 뒤인 윤 5월 21일 세자가 죽자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정조는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하지만 1777년 재위한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에도 사도세자를 추존해달라는 상소가 계속되었는데, 그 중 1792년(정조 16) 쓰여진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만 명 이상이 참여한 만인소였다. 노론은 둘로 갈라져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파와 그렇지 않은 벽파로 나뉘었다. 두 당파는 정조의 탕평책에 대한 입장 차이로 정쟁을 하였다. 1899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면서 사도세자의 시호(諡號)가 장종(莊宗)이 되었고, 후에 다시금 황제로 추존되면서 장조(莊祖)로 바뀌었다.

 

* 조선시대 붕당 정치 사례

<붕당정치의 사례)

* 선조이전 : 성종-연산군 (훈구파,사림파), 영남학파(경상도지방),기호학파(충청, 호남, 경기)

* 선조시대 : 동인-서인(이조전랑 문제), 붕당정치의 실질적 시작

* 광해군 :  북인, 남인. 대북 소복

* 현종  : 예송 논쟁

* 숙종 : 정남, 탁남

* 경종 : 노론, 소론

* 영조 : 노론 집권,  임오화변(사도세자 죽음)

* 정조 : 시파(사도세자 옹호), 벽파( 영조 임금의 처분 지지-노론계

 

* 사도세자의 죽음은 붕당정치의 피해가 아니라 아버지 영조임금과의 갈등, 사도세자의 의대증, 울화병, 귀신병과 궁녀 살해 등의 비행과 영조임금 몰래 토굴을 파고 기행을 하며,  부친 허락없이 평양을 다녀온 비행을 하여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게 함.

 

* 조선시대 붕당정치가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

필자는 우리나라 붕당정치가 왜 일어났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조선은 유학시대라 학문이 많이 발달하였다. 유럽은 산업주의로 국가가 번영하여 많은 사람들이 산업에 종사해서 관리의 등용은 인생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관리로 임명된다는 것은  높은 양반이 되고 벼슬이라 생각되며 엘리뜨의 삶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물론 가족, 사돈팔촌, 집안 문중까지 출세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것은 관리로 등용되기 위함이다. 조정의 관직은 한정되었지만 벼슬을 위해 공부를 하는 인재는 조선팔도에 엄청난 숫자가 많았다. 그러니 관리가 되면 자기 문중이나 학파에서 영원히 그 벼슬을 하고 승진까지 하고자 한다. 따라서 반대편이나 다른 문중에서 관리 등용을 꾀하는 것을 엄격하게 경계했다. 쉽게 말해서 관직은 한정되었고  그 관직을 노리는 층은 많아  경쟁이 매우 심했다. 그러니 조금만 잘못해도 그 관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가장 쉬운 관직 박탈 방법은 역모고변이다. 수 많은 역모고변은 한꺼번에 관직을 얻게된다. 반정도 2번이나 일었났다. 요새처럼 정년퇴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시험을 자주 보는 것도 아니니 관직을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 이다. 따라서 측근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붕당정치가 일어난다고 필자는 생각해왔다. 요새처럼 관직이 많으면 붕당정치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은 정당정치이여서국민들에게 멋진 정치를 하겠다고 정당이 공약을 하면 국민이 투표를 하여 관직을 주니 야만적인 붕당정치는 아니다. 잠시 조선새대 붕당정치의 원인을 생각해보고 정리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