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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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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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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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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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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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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년 ~ 8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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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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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년 ~ 8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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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興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수종(秀宗)인데, 후에 경휘(景徽)로 바꾸었다. 헌덕왕(憲德王)의 친동생이다.
겨울 12월,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자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하였다. 임금이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서 즐거워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표문(表文)을 올려 다시 왕비를 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쌍쌍인 새도 자기의 짝을 잃으면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 나서 어찌하여 무정하게도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임금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았고, 또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뿐이었다.[장화의 성은 김씨로, 소성왕(昭聖王)의 딸이다.]
興德王立 諱秀宗 後改爲景徽 憲德王同母弟也 冬十二月 妃章和夫人卒 追封爲定穆王后 王思不能忘 悵然不樂 群臣表 請再納妃 王曰 隻鳥有喪匹之悲 况失良匹 何忍無情遽再娶乎 遂不從 亦不親近女侍 左右使令 唯宦竪而己[章和 姓金氏 昭聖王之女也]
2년(서기 827) 봄 정월, 임금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나라 문종(文宗)은 헌덕왕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태자좌유덕겸어사중승(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명하여 지절사(持節使)로 조문하도록 하였다. 이어 새로운 임금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로 삼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삼아 책봉하였다.
3월, 고구려의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불경을 가지고 오자, 임금이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이게 하여 나가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8월, 태백(太白, 금성)이 낮에 나타나고,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永恭)이 사직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唐文宗聞王薨 廢朝 命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源寂 持節吊祭 仍冊立嗣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 母朴氏爲大妃 妻朴氏爲妃 三月 高句麗僧丘德入唐 齎經至 王集諸寺僧徒 出迎之 夏五月 降霜 秋八月 太白晝見 京都大旱 侍中永恭退
3년(서기 828) 봄 정월, 대아찬 김우징(金祐徵)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 눈이 석 자나 내렸다.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한산주(漢山州) 표천현(瓢川縣)에 사는 요사스러운 사람이 빨리 부자가 되는 술수가 있다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현혹되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사악한 방도로 많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법이다.”
그리고 그 자를 먼 섬에 내다버리도록 하였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인덕전에서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기에 임금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
三年 春正月 大阿飡金祐徵爲侍中 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雪深三尺 夏四月 淸海大使弓福 姓張氏[一名保臯] 入唐徐州 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鎭淸海[淸海 今之莞島] 漢山州瓢川縣妖人 自言有速富之術 衆人頗惑之 王聞之 曰 執左道以惑衆者 刑之 先王之法也 投棄其人遠島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4년(서기 829) 봄 2월, 당은군(唐恩郡)을 당성진(唐城鎭)으로 만들고, 사찬 극정(極正)에게 가서 지키게 하였다.
四年 春二月 以唐恩郡爲唐城鎭 以沙飡極正往守之
5년(서기 830) 여름 4월,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기도를 드리고, 이어 승려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夏四月 王不豫 祈禱 仍許度僧一百五十人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6년(서기 831) 봄 정월, 지진이 났다.
시중 우징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이찬 윤분(允芬)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 왕자 김능유(金能儒)와 승려 아홉 명을 당나라에 보냈다.
가을 7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진봉사(進奉使) 능유 등 일행이 돌아오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겨울 11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六年 春正月 地震 侍中祐徵免 伊飡允芬爲侍中 二月 遣王子金能儒幷僧九人朝唐 秋七月 入唐進奉使能儒等一行人 廻次溺海死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7년(서기 832), 봄과 여름에 가물어 땅이 붉게 탔다. 임금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七年 春夏旱 赤地 王避正殿 減常膳 赦內外獄囚 秋七月 乃雨 八月 飢荒 盜賊遍起 冬十月 王命使安撫之
8년(서기 833) 봄,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 임금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겨울 10월,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다시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많았다.
11월, 시중 윤분이 사직하였다.
八年 春 國內大飢 夏四月 王謁始祖廟 冬十月 桃李再華 民多疫死 十一月 侍中允芬退
9년(서기 834) 봄 정월,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9월, 임금이 서형산(西兄山) 아래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아보았다. 노인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九年 春正月 祐徵復爲侍中 秋九月 王幸西兄山下大閱 御武平門觀射 冬十月 巡幸國南州郡 存問耆老及鰥寡孤獨 賜穀布有差
10년(서기 835) 봄 2월, 아찬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으로 조정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명(金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十年 春二月 拜阿飡金均貞爲上大等 侍中祐徵以父均貞入相 表乞解職 大阿飡金明爲侍中
11년(서기 836)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은혜에 감사드리고 아울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여름 6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가을 7월, 태백(太白)이 달을 침범하였다.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하였다.
十一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遣王子金義琮 如唐謝恩兼宿衛 夏六月 星孛于東 秋七月 太白犯月 冬十二月 王薨 諡曰興德 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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