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량을 지닌 지도자
삼재장(三才章) 제칠(第七)
曾子曰: “甚哉, 孝之大也!”
子曰: “夫孝,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 天地之經而民是則之. 則天之明, 因地之利, 以順天下. 是以其敎不肅而成, 其政不嚴而治, 先王見敎之可以化民也. 是故先之以博愛, 而民莫遺其親; 陳之於德義, 而民興行. 先之以敬讓而民不爭. 導之以禮樂而民和睦. 示之以好惡而民知禁. 『詩』云: ‘赫赫師尹, 民具爾瞻.’”
해석
曾子曰: “甚哉, 孝之大也!”
증자가 “대단합니다. 효의 위대함이란!”이라고 말했다.
子曰: “夫孝,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효란 하늘의 벼리이고 땅의 의로움이며 백성의 실천해야 할 것이다.
天地之經而民是則之. 則天之明, 因地之利, 以順天下.
하늘과 땅의 벼리로 백성이 이것을 본받으니 성인께서도 하늘의 밝음을 따르고 땅의 이로움을 따라서 천하를 순종케 했다.
是以其敎不肅而成, 其政不嚴而治, 先王見敎之可以化民也.
이런 이유로 성인의 가르침은 엄숙치 않아도 이루어지고 정치는 위엄 있지 않아도 다스려지니 문명을 일으킨 선왕께서도 그들을 가르쳐서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음을 터득하셨다.
是故先之以博愛, 而民莫遺其親; 陳之於德義, 而民興行.
이런 까닭으로 앞서서 사랑함을 넓혀 백성이 어버이를 버리지 않도록 했고 덕스런 뜻을 진술하여 백성이 흥기하여 실천하도록 했다.
先之以敬讓而民不爭. 導之以禮樂而民和睦. 示之以好惡而民知禁.
지도자가 공경함과 사양함을 먼저 하니 백성이 다투지 않고 예와 음악으로 인도하니 백성이 화목하며 좋아함과 싫어함을 보여주니 백성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
『詩』云: ‘赫赫師尹, 民具爾瞻.’”
『시경』 소아(小雅) 「절남산(節南山)」에서 ‘빛나고 빛나는 태사 윤씨여 백성들이 모두 그댈 바라보네.’라고 말했다.”
삼재장(三才章)
문화적 역량을 지닌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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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가 이때까지 주욱 듣고 나서 감탄하여 외쳤다: “선생님, 참으로 대단합니다. 효의 위대함이란!”
曾子曰: “甚哉, 孝之大也!”
이에 공자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시었다: “대저 효란, 하늘의 벼리[經]요, 땅의 마땅함[誼]이며, 사람이 살면서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당위적 행동[行]이다. 효란 대체 하늘과 땅의 벼리이요 우주의 질서이니 사람이 본받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저 성인께서 사람을 가르치신다고 하는 것은 하늘의 밝음[明]【명백하게 내재하여 있는 질서, 시간적 개념】을 본받고, 땅의 이로움(利)【만물이 땅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이치의 이로움, 공간적 개념】을 활용하여, 천하백성을 가르치고 훈도하는 것이다.
子曰: “夫孝, 天之經也, 地之誼也, 民之行也. 天地之經, 而民是則之. 則天之明, 因地之利, 以訓天下.
그러므로 모든 위대한 인민의 지도자는 그 백성을 교화하는 방식이 엄숙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루어지며, 그 다스리는 방식이 엄형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질서있게 된다. 옛 선왕들께서는 천지의 벼리인 효도로써 인민을 가르치면 인민이 스스로 감화되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是以其敎弗肅而成, 其政不嚴而治. 先王見敎之可以化民也.
그러하므로 인민의 지도자는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애친(愛親)하는 마음을 인민에게로 넓혀나가야 한다. 그리하면 백성들이 그 부모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인민의 지도자는 인민들에게 말을 할 때에도 반드시 덕성의 마땅함으로써 해야 한다. 그리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도덕적 행동들을 흥기(興起)시키게 된다. 인민의 지도자가 공경하는 마음과 사양하는 마음으로 솔선수범하니 백성들이 다투지 아니 하고, 인민들을 예(禮)와 악(樂)으로써 그 문화를 선도하니 백성들이 화목하지 않을 수 없고, 인민들에게 올바른 호오(好惡)를 제시하니 백성들은 스스로 금(禁)해야 할 것을 자각한다.
是故先之以博愛, 而民莫遺其親; 陳之以德誼, 而民興行. 先之以敬讓, 而民弗爭; 導之以禮樂, 而民和睦; 示之以好惡, 而民知禁.
『詩』云: ‘赫赫師尹, 民具爾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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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재장’은 매우 이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효를 우주론적 차원(cosmological dimension)으로 승화시켜 ‘인(仁)’과도 같은 인간세의 최고덕목으로서 논구했다는 데 특별한 매력이 있다. 여기서는 우주적 질서(Cosmic Order)와 인간의 질서(Human Order)가 상응관계에 놓여 있다. 더구나 『효경(孝經)』이라는 책명이 본 장에서 유래되었다는 맥락에서도 본 장은 『효경』 속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장 중의 하나이다.
‘삼재(三才)’라는 말은 천(天)ㆍ지(地)ㆍ인(人)이라는 우주구성의 보편적 원리개념이며, 『주역』의 「설괘」, 「계사(繫辭)」하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효경간오』에서 본 장을 해설하면서 정나라의 공자 태숙(太叔: 대숙大叔으로도 쓴다)이 조간자(趙簡子)에게 정자산(鄭子産)의 말로서 인용한 구절을 도용한 것이라 하여 매우 불쾌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단지 예자를 효자로써만 바꾼 것이고, 문세(文勢)가 오히려 『좌전』의 통관(通貫)됨만 같지 못하고, 조목 또한 오히려 『좌전』의 완비(完備)됨만 같지 못하다[唯易禮字爲孝字, 而文勢反不若彼之通貫, 條目反不若彼之完備].”
그러나 『좌전』의 문장과 『효경』의 문장의 선후를 말하는 것은 매우 현명치 못하다. 막말로 『효경』을 『좌전』이 베꼈다고 해도 안 될 일은 없다. 텍스트의 문제들은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제각기 다른 양식적 표현이며 그것이 설사 같은 의미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일자에 준거하여 타자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양자가 어떤 사유의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좌전』의 문장은 나의 『논어한글역주』 제2권, 506 ~ 8에 상세히 해설되어 있다.
「삼재장」에서 내가 가장 감명을 받은 대목은 효를 통한 이상적 다스림의 결론은 ‘불숙이성(弗肅而成)’, ‘불엄이치(不嚴而治)’라는 엄숙주의와 엄형주의 배제이다. 유교적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하면서 도가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저절로 이루어지고, 저절로 다스려지도록’ 만드는 것이 도덕주의의 궁극적 이상인 것이다. ‘엄숙(嚴肅)’이라고 우리가 쓰는 말이 바로 이런 구절에서 유래된 것이다. 호문(互文)의 두 글자를 나누어 배속시킨 것이다. ‘숙(肅)’은 ‘엄숙’으로 ‘엄(嚴)’은 ‘엄형’으로 번역하였다. 가장 비근한 인간의 덕목으로서 자연스러운 질서를 사회에 안착시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스스로 기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도덕의 이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유가사상은 매우 세련된 것이며, 오늘날의 현대사회에도 물론 적용 가능하다.
「절남산(節南山)」이라는 노래는 주나라 삼공(三公) 중의 하나이며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태사 윤씨(尹)가 국정의 혼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질책하는 시이다. 국민 모두가 너 하나 쳐다보고 있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원망과 더불어 그 높은 지위에 대한 찬사를 동시에 보내고 있다. 실로 정치적 지도자 한 사람의 ‘문화적 역량’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질서에 너무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고문효경이 더 진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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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이상의 여섯 장의 취지를 마무리 하시며 말씀하시었다: “그러므로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체발부를 훼상치 아니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입신행도(立身行道)하여 후세에 양명(揚名)하고 부모님의 이름마저 빛냄으로써 완성되는 효를 실천하지 않고서는 그 화가 몸에 미치지 아니 하는 자, 천지개벽 이래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다.”
子曰: “故自天子以下, 至于庶人, 孝亡終始而患不及者, 未之有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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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평(孝平)’이란 ‘효에 있어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주희는 여기까지(제7장)를 하나로 뭉뚱그려 『효경』의 경문(經文)으로 삼았다. 그리고 여기 이후는 지금까지의 경문에 대한 전문(傳文)이라는 것이다. 얼핏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주희는 근원적으로 『효경』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각 장의 독자적 특수성을 깨닫지 못했다. 서글픈 일이다.
금문에는 본 장이 독립되어 있질 않고 제6장인 「서인장」에 융합되어 있다. 따라서 앞에 ‘자왈(子曰)’도 없고, ‘자천자(自天子)’ 밑에 ‘이하(以下)’도 없고, ‘지우서인(至于庶人)’의 ‘우(于)’가 ‘어(於)’로 되어 있다. 주희는 이러한 금문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금문효경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고(故)’로 시작하는 문장인데 그 앞에 ‘자왈(子曰)’이 있는 것은 이상하며, 그것은 원래 하나로 융합되어 있던 것을 독립시켜 효평장으로 만들면서 ‘자왈’을 삽입시켰다고 주장한다. 원래의 모습이 ‘그러므로[故]’로 연결되는 연속된 하나의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금문효경이 고문효경의 원래의 모습을 축약시킨 것일 수밖에 없다고 오히려 나는 주장한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선진문헌에서 ‘장(章)’이라는 이름이 편명 그 자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유례가 없다. 예를 들면 『논어(論語)』의 「학이」도 그냥 ‘학이’까지만 있는 것이지 그 다음에 ‘편(篇)’이라는 글자가 같이 붙어있는 것은 아니다. ‘편’이라는 것은 모두 후대에 편의상 붙인 것이다. 그런데 『효경』만이 제목에 ‘경(經)’이라는 글자가 붙어있고 모든 분절에 딴 문헌으로 말하면 편에 해당되는 편명에 모조리 ‘장(章)’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것이다. ‘개종명의장,’ ‘천자장,’ ‘제후장’, … 이런 식으로! 이것은 참으로 유니크한 사례이다.
장(章)이란 무엇인가? 장이란 ‘경(竟)’이란 글자와 동계열의 회의자인데, 본시 악곡에 있어서 가사가 일단락지어지는 것을 말한다. 『설문』에도 ‘장(章)’은 ‘음(音)’의 부류에 소속되어 있으며 ‘음악이 일단락지으면 일 장이 된다[章, 樂竟爲一章].’라고 풀이되어 있고, ‘가사가 그치는 곳이 장이다[歌所止曰章].’라는 주석이 있다. 결국 『효경』의 저자는 매우 의도적으로 『효경』 전체를 하나의 음악으로 보았고, 그 음악이 22장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효경』이 노래처럼 암송되면서 일반백성들의 가슴속에 신바람처럼 울려퍼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따라서 「개종명의장」에 대하여 「효평장」이라는 일단락의 중간 마무리를 독립시킨 것은 너무도 정당성이 있다. 더구나 ‘효망종시(孝亡終始)’의 해석을 잘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여기서의 종(終)과 시(始)라는 것은 「개종명의장」에 있는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이라는 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따라서 ‘개종명의’에 대하여 ‘효평’이라는 마무리는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왈’이 ‘고(故)’ 앞에 있는 것도 너무도 정당하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공자왈’은 ‘이상의 논리를 마무리하여 말씀하시었다’라는 뜻이며, 그 말씀의 내용이 ‘그러므로’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상기의 논지를 이어 다시 말씀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효경』의 악장의 특수성을 이해못한 자들이 금문에서 압축시켰고, 주희는 그것을 더 과감하게 압축시키려 했던 것이다. 모두가 용렬한 발상이다. 그리고 ‘천자’ 다음에 ‘이하(以下)’가 있는 것도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요즈음 간백문헌의 느낌으로 보아 그러한 연접사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고문용례인 것이다. 구어체에 보다 충실함을 반영한다. 이런 맥락에서 세밀하게 검토해본다면 고문효경의 진실성은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용
출처 : 건빵이랑 놀자
건방진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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