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역사 등 좋은글 90

옥성서원, 수선서당(상주시)

* 옥성서원 옥성서원은 1551년(명종 6)에 신숙주의 증손인 신잠(申潛)이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세운 18개의 서당 중의 하나인 수양서당(首陽書堂)이 그 모태이며, 1633년(인조 11)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1648년(인조 26) 수해로 옥성서원이 있던 서산이 무너져 서원이 묻혀버렸다.1710년(숙종 36) 현재의 자리인 외남면 신상리 진등 마루에 새롭게 건물을 지어서원을 복원하였다.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그 뒤 단소(壇所)를 설치, 계속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7년 사림의 중론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서원은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득배(金得培)·신잠(申潛)·김범(金範)·이전(李㙉)·이준(李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을 위하여 창건하였다. 위의 지도는 외남면 ..

정여립과 기축옥사

조선시대 동인과 서인과의 당파 싸움에서 서인이 득세하게된 사건의 하나이다.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논하기 전에 정여립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잘난 미남이라고한 정여립 초상 * 출생 - 사망 : 1546년(명종 1) ~ 1589년(선조 22), 성장과정, 정치계 근무 과정, 낙향배경 정여립의 자는 인백, 본관은 동래, 출생은 전주, 경사와 제자백가에 능통 1570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여립의 태생 설화에서는 고려 중반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 정중부가 태몽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어릴때 자기집의 여종이 자기의 잘못을 알렸다고 살해한 무서운 아이였다. 에는 정여립이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

송사련과 반석평의 비교

* 송사련은 은혜를 배반한 조선시대 대표적 악의 인물이고 반석평은 은혜를 갚은 천사 같은 인물이다. 송사련은 외가의 역모고변으로 한때 출세의 가도를 달렸으나 2대에 다시 반노집안인 천민으로 내려간 집안이고 반석평은 후손들이 양반으로 대대로 복받은 대조적인 인물이다. 역사상 비교되는 두 인물은 교육하시는 분들에게 선악의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오니 활용바랍니다. 두사람은 조선 중종시대 사람인데 반석평이 24년 먼저 태워났다. * 먼저 송사련의 자료를 올립니다. 송사련(1496~1575)은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의 고종사촌이었지만, 어머니가 서얼 출신으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가 왜 사촌을 역모로 내몰았는지는 다음의 이유가 거론된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송사련이 남곤과 심정의 사주를 받았다고 서술하였고, 『대동..

정언신(조선 중종-선조시대 문신-소양서원)

* 문경에서 자랑스러운 조선시대 문신 정언신 대감 자료를 올립니다(소양서원, 잉카박물관 포함). * 잉카-마야유적지는 볼만한 관광지라 올려봅니다. 정언신 대감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조선시대 문신 정언신 대감 소고 * 출생1527년-사망 1591년, 자는 입부. 호는 나암, 본관은 동래이다. 현재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 출생(당시는 상주땅)했다. 29세인 1566년 명종21년 병과에 급제하여 사국에 들어가서 근무하다가 검열(檢閱)이 되어『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그 후 전라도 도사·헌납·장령 등을 지냈다.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과 친히 지내어 통천서각(通天犀角)을 증정 받으며 장래에 나를 대신하리라고 하였다. 이후 우부승지에 올랐고, 1579년(선조 12년)에 우승지에(右承旨)이에서 함경도 순..

영주시 순흥과 이보흠 (조선 세조시대 순흥부사)

이글의 근거지인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위치를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은 조선시대에는 순흥도호부로서 큰 고을이었다. 역모, 강상 사건, 일제시대 행정개편으로 영주시의 1개면으로 격하된 면소지로 변모했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존재하고 순흥안씨의 본거지-세거지이다. 조선 세조때 순흥에 유배를 온 금성대군(세종임금의 6째 아들)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사전에 금성대군의 여종과 순흥도후부 급창이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 격문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풍기현감이 격문을빼앗아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이사건으로 금성대군은 거사에 실패하여 사사당하고 이보흠은 참살당한다. 그리고 순흥은 역적의 고장이라 순흥부로 격이 내려간 고을이 되었고 이 정축지변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당, 안겸 등 이외에는 큰..

호랑이 선생님

호쌤의 남동생 우리 집 장남 ​ 소싯적 인물과 몸매, 그리고 축구실력으로 뭇 여성들을 울렸건만!! ​ 나이앞에 장사없다. 배가...ㅋㅋ ​ 열정적 대디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몸사리지 않는 남동생 ​ 학교운영위원 지역봉사단체 등 애들한테 도움되는 건 다 한다. ​ 오늘은 ​ 제자리뛰기 체육실기를 준비하는 딸을 위해 몸소 시범! ​ ㅋㅋ 근데 2년전보다 탄력이 떨어져보이네. ​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데 저런 열정적 아빠가 있으니 뭘 걱정할까? ​ 잘 될 집안이다. ​ 예전에는 엄마가 주 양육자였지만 이제는 아빠 파워가 점점 커진다. ​ 아빠랑 대화가 많은 애들은 또 다른 발전을 보인다. ​ 좀 더 넓은 시각, 여성의 섬세함과는 다른 대범함,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스포츠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진..

팔도 감사 반석평(조선시대 중종)

우리나라에는 8도 감사를 역임한 사람은 2명이라고 한다. 1분은 조선시대 초 태조임금 당시의 함부림이고 또 1분은 조선시대 중종 임금시의 반석평 님이다. 이중에도 반석평 선생님은 8도감사는 물론 5도 병사도 역임했다고 한다. 오늘은 반석평 선생님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합니다.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반석충 묘역과 사진(아래) 반석평 선생님 초상화 ♣ 조선 중종시대 문신 반석평 선생님 - 출생, 사망, 성장환경, 출세과정 : 1472년-1540년 이고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며,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의 형 반석정은 생원시에, 동생 반석권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조선시대 역대 감사중 8도 감사를 모두 역임한 사람은 태조때 함부림과 중종때 반석평이라고 한다. 반석평 선생님은 거제 반씨에..

보진재 노사신 선생님(조선 전기 영의정)

보진재 노사신 선생님과 소재 노수신 선생님 고찰 * 노사신 선생님 본관은 파주 교하 노씨, 출생, 사망 연대 1427년-1498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임금시대 사람이고 세조때 많이 활동한 정치가. 노태우 전대통령도 교하 노씨 * 노수신 선생님 본관은 광주(광산) 노씨, 출생, 사망 연대 1515년-1590년 중종10년-선조23년이고 유배생활을 20년 이상하고 말년에 영의정까지 역임했지만 마지막에 정여립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탄핵되고 곧 병사함. * 노씨 성은 같지만 본관이 다른 분인데 노사신이 선배정치가입니다. 중종과 선조때 문신 소재 노수신과 이름이 비슷하여 많은 분들이 혼란을 격고있어 보진재 노사신 선생님의 자료를 올립니다. 사실 노사신 선생님이 노수신 선생님보다 88..

소재 노수신 선생님(조선 선조시대 영의정)

소재 선생님은 1515(중종10)년 출생하여 1590(선조23)년으로 76세에 사망 상주시청에 소장된 소재 노수신 영정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 학자.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 이재(伊齋) · 암실(暗室) · 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상주(尙州)인데, 서울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활인서(活人署)별제(別提)노홍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예조 참판이자화(李自華)의 딸이다. 풍저창(豊儲倉) 수(守)노후(盧珝)의 손자이고, 탄수(灘叟)이연경(李延慶)의 문인(門人)이며 그 사위이다. 정부 요직에 골고루 근무하신 후 마지막 벼슬은 영의정임. 소재 노수신 선생님 묘역은 경북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봉산서원 30m 위에 존재합니다. 상주가 고..

오천대감 이종성 일화(조선 영조시대)

* 조선후기 영조때 문신인 이종성 대감의 일화를 재차 올립니다. 이종성(李宗城.1692.숙종 18∼1759.영조 35) 조선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 대감 초상화 조선 영조 때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시호는 효강(孝剛),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항복(恒福)의 5세손이며,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 어려서부터 성리학(性理學)에 힘을 기울였으며, 1711년(숙종 3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46년(영조 23) 문과에 급제, 삼사(三司)를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국가 재정을 충족케 하여 삼남(三南)의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서북 변경을 튼튼케 하는 대책이라고 진언했다. 왕에게 가납(嘉納)되어 관서암행어사(關西暗行御史)로 내려가 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