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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목사 김상용 선생님-조선시대

문장대 2022. 8. 4. 20:39

현재 상주박물관 로비의 ‘이달의 작은 전시’ 코너에서 귀중한 ‘도선생안’을 만날 수가 있으며, 아울러 1604년(선조 37)에 부임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목사가 체계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 누대에 걸쳐 수백 명의 명단이 적혀 있는 「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과 또한, 조선 시대 경상감영의 운영에 대한 종합적인 ‘행정편람서’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영영사례(嶺營事例, 1862~1863년 편찬)」, 그리고 1777년(정조 1) 이진흥(李震興)이 향리(鄕吏)의 사적(事蹟)을 모아 정리하여 상주에서 간행한 연조귀감(掾曹龜鑑) 등도 볼 수가 있다.  상주시 경천대를 구경하시면 옆에 있는 상주박물관을 한번 들리시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 

 

* 출생과 사망연도 - 김상용(金尙容.1561.명종 16∼1637.인조 15)

 

   조선 인조(仁祖) 때 문신. 자 경택(景擇). 호 선원(仙源)ㆍ풍계(楓溪). 시호 문충(文忠). 본관 안동(安東). 영의정 상헌(尙憲)의 형.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 검열이 되고, 정철(鄭澈)ㆍ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병조좌랑(兵曹佐郞)ㆍ정언을 지내고, 수찬ㆍ응교로 있다가 원수(元帥) 권율(權慄)을 따라 호남ㆍ영남 지방을 왕래하였으며, 1598년 승지가 되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정주ㆍ상주 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도승지(都承旨)ㆍ대사헌(大司憲)ㆍ형조판서(刑曹判書_)를 지냈으며, 폐모(廢母)의 논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예조ㆍ이조 판서에 전되고, 기사(耆社)에 들어가서 벼슬을 사임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1632년(인조 10)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묘사(廟舍)를 모시고 강도(江都: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江華城)으로 쳐들어와 함락하게 되자, 화약(火藥)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두 시조작가인 김상헌(金尙憲)ㆍ김광욱(金光煜)은 그의 아우로 모두 문장에 이름이 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인조 때의 상신(相臣)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ㆍ풍계(楓溪)ㆍ계옹(溪翁), 시호는 문충(文忠). 서울 출생.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좌의정 상헌(尙憲)의 형,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이다. 1582년(선조 15)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江華仙源村: 지금의 江華郡 仙源面 冷井里)으로 피난했다가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토벌과 명나라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1598년 승지에 발탁되고, 그 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면서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출보(黜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30년(인조 8)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바로 사퇴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에게서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黃愼)ㆍ이춘영(李春英)ㆍ이정구(李廷龜)ㆍ오윤겸(吳允謙)ㆍ신흠(申欽)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鄭經世)와는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초에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2왕(二王: 晉의 王羲之ㆍ王獻之 父子)의 필법을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군수(豊德郡守)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전액(篆額)을 남기고 있다.

   시조로 <오륜가(五倫歌)> 5장,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이 전한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自焚)이 아니라 실화(失火) 때문이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선(朴東善)ㆍ강석기(姜碩期)ㆍ신익성(申翊聖) 등의 변호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안변 옥동서원(玉洞書院),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선원유고> 7권이 전하고, 판본은 안동 봉정사(鳳停寺)에 보관되어 있다.

【김상용선생묘(金尙容先生墓)】

   남양주시 기념물 제99호.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6 소재. 조선 선조ㆍ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국한 선원(仙源) 김상용(1561∼1637) 선생의 묘소이다.

   선조 23년(1590)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난갔다가 정철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1598년 승지에 발탁되고, 그 뒤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면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조반정 뒤에 병조ㆍ예조ㆍ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인조 10년(1632)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바로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청나라 군대가 성을 함락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국하였다.  부인 안동 권씨와의 합장묘인데, 묘 앞에는 묘비ㆍ상석ㆍ향로석이 있고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

[출처] 조선 문신 김상용(金尙容)|작성자 

 

 

 상주시 연원동 흥암서원 옆 서산재(서산서원) 앞 김상용 유애비

 

 

   상주시 해가마을  오랜지 골프장 근처의 연원동 충의단-흥암서원 옆

 

  상주 연원동 흥암서원 옆 서산재 앞에 있는 김상용 유애비

 

 

 

 

상주 목사를 역임한 김상용 선생님 초상화